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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의 한계와 노대통령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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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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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은 이상(理想)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이상을 향하여 가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상을 어느 정도 성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을 성취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이상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이란 인간의 욕망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이 절제되지 않고는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이상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고, 또한 그러한 능력 면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은, 인간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대개 과학 실증주의와 함께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미래를 낙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도의 개선과 인간 의식의 발전을 통하여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그들의 낙관론은 논리적 사고를 하는 지식인들에게 매우 인상 깊게 어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 계와 인간 사회가 철저하게 어떤 법칙에 의해서만 진행된다고 믿는 이들은 좋은 제도와 인간 의식의 진보를 통하여 인간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 즉 정치 경제 등 인간 문화 전반에 걸쳐 보다 나은 개선은 전적으로 인간 능력에 달렸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사람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작용하지만 비성경적인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에게는 그 자신이 자신에게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소망은 자신 밖으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한창 인간 이성의 능력이 과대평가되던 때 독일의 그 시대를 풍자하는 재미있는 민화(民話) 가 있습니다. 그 민화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채를 잡아끌어 올려 스스로를 물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건져 낼 수 없습니다. 나 아닌 누군가가 건져주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물에 빠진 자신을 스스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물에 빠진 인간을 나 아닌 타자(他者), 즉 하나님이 건져주신다고 가르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았지만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한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는 국민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에서는 그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고를 나와서 사법고시를 거쳐 변호사가 되어 약자 편에서 공익과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분의 생애의 역정을 돌아보면, 그분은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 넘은 미국의 오바마처럼 입지전적 인물로서 젊은이들에게 도전을 주기에 충분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권위주의의 벽을 허문 것은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할만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주의와 복잡한 인맥과 학연 등으로 얽혀 있는 정치 경제 학계의 현실과 진보와 보수로 편 가르기를 해 놓은 것 같은 국민들과 종교의 편향성들은 개혁과 쇄신의 정의로운 정치를 표방한 노무현대통령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검증되지 않아서 깨끗한 것처럼 보였는지는 몰라도 노대통령 자신이나 많은 국민들도 그가 역대 지도자들보다는 나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부정한 돈의 규모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부정에 연류 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끝까지 깨끗한 정치를 표방했던 대통령이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에게까지 범죄 혐의자로 검찰의 신문을 받게 한 것은 그의 재임 기간에 정치개혁의 역부족을 절감하며 “더러워서 대통령 못해먹겠네”라고 했던 것 이상으로 인생의 좌절을 느끼게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분은 인생을 비교적 깨끗하게 살았고 부정을 멀리하고 강자 편에 서기보다는 약자 편에서 생각하고 활동한 것이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배경과 지반이 든든하지 못한 그에게 정의와 윤리 도덕은 더 없이 소중한 자산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상과 철학에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는 진보적인 상상과 가치관이 지배적으로 작용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분은 어쩌면 자평(自評)에서나 국민들의 기억 속에 끝까지 청렴한 지도자로 남기를 바라고 어쩌면 그 문제에 관한한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간이 유한하고 악하고 이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불법의 경중이야 어찌되었건 깨끗한 정치 지도자를 표방했던 분이 부정한 돈의 수뢰(受賂) 혐의로 검찰청을 드나들게 된 것은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을 것이며, 그 같은 상황은 자신에게 대한 실망을 넘어 생을 포기하게 하는 무게로 그를 누르고 목을 조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를 좋아하고 지지했던 이들의 순수한 눈망울들이 발가벗겨진 자신의 치부와 오버랩 되는 상상들은 피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고 선한 일에 관한한 무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인간관을 가졌다면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과실과 무능의 실증(實證)에 직면하게 될 때 이를 극복할 신념이나 철학이 없어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는 의와 진리를 위해서 살도록 가르치지만 자신의 과실과 무능을 절감하는 상황에서도 생을 포기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의로운 존재로 알았다가 자신이 죄인이며 또한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 더욱 하나님께 의존적으로 살게 됩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는 진보적인 사상은 절망적 상황에서 생을 포기하게 하지만 인간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절망적 상황에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소망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것은 무지이며 교만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인생관은 역설적이게도 철저한 자기 실망과 포기에서 출발하게 하기 때문에 극단적 절망에서도 겸손을 배우고 결코 생을 포기하지는 않게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끔찍한 죄를 지은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서 몸부림쳤지만 그가 깨달은 것은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출생하기 전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노대통령이 그 같은 사실을 알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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