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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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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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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9일 한국의 조선일보에 게재된 조선만평이라는 시사만화가 재미있어 소개합니다. 어느 교도소 안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지명대회가 열렸습니다.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단상에는 의장이 사회를 보고, 중요 인사 한 사람은 뒤에 앉아 있습니다. 의장이 대통령을 지명하는 장면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에......... 17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그런데 그 의장이 바로 김경준이고, 단상 뒤에 앉아 있는 중요 인사는 “제 16대 대통령 지명자 김대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사만화의 자체 촌평이 “웃어, 말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범죄자가 지명하게 되어 있다는 풍자입니다..

지금 한국은 선거전과 BBK 사건이 맞물려 대단히 혼란스럽습니다. 이명박씨의 가장 큰 실수는 사기꾼에게 속은 것입니다. 정동영씨가 이명박씨에 대해 대통령 될 사람이 사기꾼에게 속았다는 것 자체가 대통령 될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기꾼에게 속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 가운데는 이명박씨가 김경준이 사기꾼임을 알고 접촉한 것은 아니라는 추측이 담겨 있습니다.

영어 속담에 "Guilt by Association." 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련이 있으므로 유죄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는 말과 뜻이 비슷합니다. 김경준은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좋은 머리를 가지고 사기꾼이 된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죄 중에 드러난 것만 보아도 그는 정상적인 비즈니스나 직장 생활을 한 것이 아니고 사기 치는 것을 비즈니스로 한 사람 같습니다. 여권위조 7번, 법인 설립허가서 위조 19번, 드라이브 라이센스 위조 2번, 유령회사설립, 주가조작, 국제적 돈세탁, 공금횡령 384억 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죄가 드러날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활동의 상당부분이 사기행각이고, 지금까지 거짓말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그의 말에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의 누나도 죄를 지어 미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상실했다고 신문에 도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명박 씨가 이런 사기꾼과 사업을 같이 했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죄가 될 것입니다. 이명박씨가 김경준이 사기꾼인 줄을 모르고 그랬다고 해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명박씨가 김경준을 알게 된 것은 교회의 장로인 그의 아버지 김세영씨를 통해서 였다고 하니까 아마 그가 사기꾼인 줄은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밝혀져야 알게 될 것입니다. 김경준에 관한 보도를 보면 그의 아버지, 그의 어머니, 그의 아내, 그의 누나 등 그의 모든 가족이 그의 사기행각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가족은 사기꾼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김경준의 아버지 김세영씨가 교회 장로라는 사실에서 문제를 보려고 합니다. 장로가 사기꾼 아들을 중요 정치인에게 소개해 준 것입니다. 김세영씨가 아들이 사기꾼인 것을 몰랐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미연방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2003년 3월 3일부터 김경준의 아버지 김세영은 윌셔스테이트 은행에 아들 김경준의 범죄 수익 중 일부인 39만불을 은행에 넣어 놓고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호화롭게 생활하다가 연방법원에 의해 쓰다 남은 잔액 17만 불을 압류 당했다고 합니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 않을 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인데 쉬쉬한다고 가려질 일도 아니고, 진위를 바로 알고 다른 사람의 죄라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문제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또 한 번 한국교회는 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큰 사기꾼은 교회에 다 몰려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교포교회도 한국교회이기 때문에 예외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의 특정 직분 자가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고, 교회가 전체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나 대다수 교인들은 집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나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상황입니다. 나에게 악한 의도가 전혀 없는데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악한 죄를 짓는 자의 죄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사람 곁에 있다가 그 죄에 연루되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도 우리가 선의의 피해자라고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사도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목회에 대해 권면하는 말씀 중에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 5:22)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간섭지 말고”는 아주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번역은 딤전 5장22절이 마치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해도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는 번역입니다. 여기 “간섭하다”에 해당하는 희랍어 코이노네이(κοινώνει)는 ‘나누다’, ‘동참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to share, participate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으로서 그 행위에 대해 동일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to share and participate in the deeds of others means to be equally responsible for them).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μηδέ κοινώνει)”는 “동참하지 말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본문의 문맥이라든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할 때 훨씬 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번역은 NIV가 “do not share in the sins of others”라고 하였고, KJV도 “neither be partaker of other men's sins”라고 하여 역시 남의 죄에 관계하거나 동참하지 말라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 한 구절을 잘못 번역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낳게 했는지 모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남이 죄를 지어도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간섭은 해야 하지만 동참하지는 말라고 가르칩니다. “범죄 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고 했는데 이것은 남의 죄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의 “간섭지 말고”는 동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교회공동체가 함께 성결하게 되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속의 부르심에서 우주적 포괄성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혼자 성결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함께 성결하게 되어야 하고, 함께 감사하게 되어야 하고,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심지어 자연이 인간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는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하물며 가족이나 같은 교회 성도가 죄를 범하는데 나만 상관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태도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딤전 5:22)라고 하여 자격이 없는 사람을 장로로 안수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장로가 건축위원장을 하면서 영수증도 없는 돈을 지출하고,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일을 했습니다. 후임 목사가 부임하여 왔을 때는 그 문제로인하여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건축회계보고에 대한 의혹이 많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장로는 건축에 관련된 서류와, 세금 관계서류를 공개하지도 않고 인계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 부임한 목사를 비난하다가 바로 가까이 있는 이웃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그 교회는 세금과 보험 등 수 십만 불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가 그 이웃교회로 가자 그 이웃교회에서 즉시 그 장로를 받아 중요한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 교회는 뉴욕에서 부흥하는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간 장로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기는 것은 그 장로가 저지른 죄에 동참한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며”라고 한 말씀은 단순히 안수할 때만 주의하라는 뜻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교인들에 대해서도 주의하라는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는 것은 여러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죄가 되는 일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히 가담하는 것도 동참하는 것이 되어 비록 그 일을 통하여 자신이 아무 이익을 보지 않아도 그것은 유죄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방조하는 것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죄 되는 일을 할 때 부추기는 것은 더욱 나쁜 죄입니다. 이 경우는 실제로 죄를 짓는 당사자보다도 더 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나 자신이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물론 죄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내가 정직하게 말해서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직하게 말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정직한 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지 않고 눈을 감아서 나쁜 사람이 부당하게 이익을 본다면 말해야 하고 고발을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번 삼성그룹에 대한 김용철 변호사의 고발은 귀추가 주목되는 사건입니다. 만약 삼성 그룹이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고 고위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김용철 변호사의 고발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삼성그룹이 김용철 변호사가 고발한 것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삼성그룹에 큰 손해를 끼친 것이니까 잘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정직하게 말해서 약자가 피해를 본다면 그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정직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야겠지만 약자는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말을 하더라도 약자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경우는 내부자 고발의 경우라서 만약 삼성이 잘못을 했어도 한국적 정서로서는 사람들이 김용철 변호사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삼성에서 녹을 먹든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라는 식으로 이 사건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교문화에서는 내부고발이라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공자는 아비가 죄를 지어도 자식이 고발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부 고발은 범죄를 예방하고 줄이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국제청렴성기구 같은 데서는 내부 고발을 적극 장려하고 있습니다. 삼성이 잘못을 했다면 김용철 변호사는 매우 용감하게 양심적 결단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내부고발을 whistle blowing이라고 합니다. 호각을 분다는 뜻입니다. 누가 잘못하면 크게 호각을 불어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경계를 할 것이기 때문에 범죄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내부고발자 보호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이나 이곳 미국 같은 나라에도 그런 법이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나 공무원 사회에서 사람들이 관행적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 그 중에 신자가 있다면 그것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막아봐야 효과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 군사독재 시절에 군대 같은 곳에서는 고발해봐야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신자는 그들과 함께 부정한 짓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같이 부정을 하면 사람들이 안심하고 부정을 저지를 것이지만 고발은 못하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부정한 짓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조심을 할 것입니다. 적극적인 태도는 아니지만 그런 태도는 범죄를 억제하는데 나름대로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자는 죄를 고발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억제하는 역할이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일에 동기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도 남의 죄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면 문을 잠그지 않아 사람들이 유혹을 받아 도적질을 하게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훔친 놈도 나쁘지만 잃어버린 사람도 나쁘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귀중품을 아무데나 두거나 돈을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곳에 두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유혹을 받게 하는 것도 그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범죄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으면 그것도 남의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어떤 강도가 약한 여자의 핸드백을 빼앗으려고 하는 데 여자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리를 지르면서 도움을 구할 때 보고만 있다면 그것은 역시 남의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물론 강도가 건장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힘센 남자라면 쉽게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태권도 유단자라든가 호신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구라파의 많은 나라에서는 범죄를 막을 수 있는 데도 보고만 있는 방조의 경우에 처벌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선한사마리아인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방조도 그 죄에 동참하는 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야고보도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한 것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본문을 통해 교회에 적용하면, 교회가 현재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을 장로로 세우는 것은 교회가 그 사람이 짓는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노회가 범죄 한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여 세우는 것은 노회가 그 사람의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정부나 정당이 범죄자를 두둔하는 것은 그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남의 죄에 동참하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나 한 사람은 그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이 다 알지 못하게 여러 사람과 조직에 연루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 도덕군자로 깨끗하게 산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죄에 동참하게 될 위험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구라파의 여러 나라가 “선한사마리아인의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벌주는 것은 잘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법은, 그런 것까지 법을 만들어 제재를 가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수준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의 법이 없으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요구는 수준이 너무 높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수준이 너무 높아 우리는 도저히 그 요구를 다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다 이행할 수 없으니까 포기하고 말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를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수준은 너무 높은 것이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고 적당하게 성경의 요구 수준을 평가 절하해 버립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의 요구 수준을 낮추어 놓아서 신앙생활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여 욕을 먹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짓말 안 하려고 별로 노력을 안 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을 안 합니다. 적당히 살아갑니다. 서로 간섭도 안 합니다. 그래서 목사도 목사답지 못하고, 장로도 장로답지 못하고, 집사도 집사답지 못하고, 권사도 권사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고, 신자들 사이에서 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회적 큰 범죄 사건이 터졌다 하면 교회 중직자가 거기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큰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어도 늘 성경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고 무지한 자신의 판단을 따라 삽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가수 조영남씨 어머니가 권사님인데, 그 집에 월세 사는 사람이 가짜 꿀을 만들어 파는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합니다. 설탕과 물엿과 여러 재료를 넣고 끓여서 가짜 꿀을 만드는데 권사님이 새벽기도에 다녀와서는 늘 찬송을 부르면서 그분들의 일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조영남씨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가니까 어머니 권사님이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어서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권사님이 가짜 꿀 만드는 일을 도와주면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기도 열심히 하시는 어머니권사님이 “이놈아, 안 그러면 월세가 안 나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권사님은 아들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남의 죄에 동참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도덕적 수준도 높여야 하지만 사회의 도덕수준도 높여야 합니다. 사회가 부패하면 우리가 그 죄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사회가 깨끗하면 내가 남의 죄에 동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교회에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에서 도덕적 수준이 높아야 그 교회의 신자들이 죄에 동참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가 나쁜 일을 하면 온 교인이 나쁜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는 문제에 대해 예민해야 합니다.
거짓말 하고 사기를 치는 사람은 교회에서 장로나 집사로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사기꾼 지도자를 배출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구원의 길을 전하고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사명인데 그 사명에는 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의 죄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에게 너무 값싼 은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복과 값싼 은혜부터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소위 적극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죄를 알지 못하고 은혜를 깨닫는 길은 없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고 은혜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값싼 은혜입니다. 나 자신이 비판 받는 교회의 일원이고, 타락된 사회의 일원입니다. 나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나쁜 일에 동참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 한 사람만 깨끗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너무나 유치한 수준입니다.

법률적으로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하는 죄를 commission 이라고 하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를 omission이라고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방조의 죄이고 또한 태만의 죄에 해당합니다. 태만의 죄이지만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태만의 죄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방조의 죄, 태만의 죄를 엄중히 금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쑥 들어가고 말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 씨의 학력 위조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었었는지 모릅니다. 신정아는 절에도 다니고 교회도 다니고 했던 모양인데, 기독교와 불교와 대학과 청와대와 국회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신정아의 죄에 동참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또 한국 교회와 정치계와 법조계가 김경준의 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선한 일도 드러나지만 모든 죄는 주도적이든 동참하는 죄이건 다 들어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모든 죄가 다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한 죄도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경건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우리 스스로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에도 동참하지 않도록 책임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동참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딤전 5: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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