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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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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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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는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죄입니다. 사소한 윤리적인 실수가 아니라 반역의 죄이기에 그 죄벌이 무섭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얼른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동산을 거니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찾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라고 부르시는데 아담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의 이 부분은 얼마나 은혜로운 대목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화가 나면 따지고 큰 소리를 지르거나 아주 화가 나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꾸를 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인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는 방법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면서 찾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숨은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에 알려 드리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십니다. 설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인간의 실존을 묻는 질문입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느냐를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그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아시지만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마치 하나님께서 몰라서 물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대답합니다. 벗었으므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숨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사람의 수준에서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고 하시면서 “혹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은 것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 말을 걸어오십니다. 이 때 우리의 태도가 중요한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하면 좋은데 이유를 대고 변명을 하면 죄를 증폭시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성경에서 남자를 가장 부끄럽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준 Headship의 권위를 실추시킨 치명적인 사건입니다. 가장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평화를 위해서 여자의 말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요구에 대해서는 누구의 요구이건 단호히 “안 돼!”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평소에 자신이 신앙적으로 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이 잘못해도 “안 돼!”라는 말을 못하고 혹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권위가 없어 그런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하나님까지 걸고넘어집니다. 여자가 따먹고 나에게도 주어서 먹었는데 그 여자는 하나님이 나에게 준 바로 그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논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속성인데 하나의 죄는 그 하나로 머무는 법이 없습니다. 곧 이어 제 2의 죄를 낳고 제 3의 죄를 낳습니다. 어거스틴은 “죄는 죄의 어머니요 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탓하고 변명하면 내가 책임을 면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죄가 증폭되고 문제를 복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죄는 인간을 결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립시킵니다.

죄의 원인은 불순종이고 불순종의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불순종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첨가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상식적인 판단을 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도 상식적으로 원인을 따지자면 여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아담이 직접 따서 먹은 것이 아니니까 그런 변명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으로서는 얼마든지 할 말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하면 아담은 자가가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혼자서 살도록 창조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Aristoteles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철저히 독립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상호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아담처럼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죄라도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전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다보면 모든 인간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게 되고 결국 하나님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죄를 짓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데까지 가는 논리적 과정에서 인간은 엄청나게 죄를 증폭시키게 되고 인간의 존엄성은 곤두박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적인 존재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죄를 증폭시키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인권과 자유를 위해서, 정의와 평등을 위해서, 윤리와 도덕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 상황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더욱 치명적인 죄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가인의 후예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이루게 되는 문명은 엄청나게 죄를 증폭시키는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어 경계를 삼게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고 두려워서 하나님을 피해 숨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말을 걸어오신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의 사건인지 모릅니다. 죄인이 사는 길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의 대화가 열려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화는 하나님의 주도하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심이 은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9,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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