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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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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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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옆에 석탄 공장이 있는데 석탄 공장 주인이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석탄을 한 삽씩 퍼서 던졌습니다. 종업원이 주인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석탄 공장 주인이 말하기를 철 길 건너편에 아주 가난한 노인이 살고 있는데 너무 가난하여 땔감이 없어서 늘 기차에서 떨어진 석탄을 주워 땔감을 하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관차 화부가 실수로 석탄을 떨어뜨리면 그걸 주워서 불을 피워 추위를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기차가 석탄을 때는 증기 기관차에서 전동차로 바뀐 것도 모르고 늘 하던 대로 석탄을 주우러 나갔지만 석탄을 줍지 못하고 허탕을 치곤하였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석탄 공장 주인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석탄을 던져 놓아 가난한 노인이 석탄을 주울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석탄 공장 주인은 아주 경건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 가난한 노인을 도울 마음이 있다면 석탄을 한 트럭 실어다 주어서 추운 날에 석탄을 주우러 나오지 않아도 되게 할 일이지 기찻길 옆에다가 석탄을 던져 놓는 것은 무슨 심보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데는 사회적, 심리적 고려가 필요합니다. 내가 여유가 있다고 하여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고려 없이 주는 자 입장에서 아무렇게나 돕는다면 그것은 진정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견딜 수 없이 비참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자기가 남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되어 자존심의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자존감입니다. 사람이 무시당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움을 준 사람에게 늘 빚진 자 의식이 있고, 그 빚진 자 의식은 관계의 상하를 형성하게 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되고 비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가난하고 어려운 교인을 도울 때가 있습니다.
나의 경험으로 교회에서 도움을 받은 교인은 언젠가는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심리적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목사는 인간적으로 섭섭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배신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주는 자 위주의 생각입니다. 도움을 받는 자는 물질적 도움과 함께 자존심에 상처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자존심까지 세심한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도움을 받고도 도움 받았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위선과 자랑을 금하신 말씀이지만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가 전제된 말씀입니다. 구제하는 것을 나팔 불어 자랑하면 상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보다 우선적이고 깊은 교훈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제 대상이 교인일 때 재정보고에서 구제 대상을 비밀로 하는 원칙을 정해 놓았습니다. 잘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가난한 교인을 지혜롭지 못하게 도우려했다가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 없는 아주머니가 삯바느질로 외동딸을 공부시키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 때가 70년대 초였으니까 서울에서도 교인들이 성미를 했습니다. 성미로 모아진 쌀 얼마를 그 집에 갖다 주었습니다. 그 일로 그 아주머니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그 아주머니는 다시는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편 없이 사는 것만도 서러운데 교회가 자기를 거지 취급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그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갔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딸 친구들 앞에서도 눈물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울음은 한이 깊은 울음이었고 깊은 상처를 받은 울음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누구를 돕는다는 것도 참 조심해야 할 일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좀 있는 사람은 남의 도움을 받아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아주 못 견디게 자존심 상해합니다. 정말 먹을 것이 없고 잠잘 곳이 없는 사람은 자존심 상하는 것을 배고픈 것 못지않게 견디기 어려워 하지만 좀처럼 내색을 안 합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적으로도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북한에는 가난하여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온 세계가 그 사실을 보도하고 떠드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면 도움 받으면서 자존심 상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안 받으면 굶어죽게 된 상황인데 그 사실을 온 세계가 떠들면서 돕겠다고 하면 자존심도 상하고 상처도 클 것입니다.

돕는 사람들이 이 점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생각 없이 쉽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얻어먹는 주제에”, 혹은 “굶어죽게 되었는데 자존심은 무슨 얼어 죽을 자존심이냐?”고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배고프지 않고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요즈음 한국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70년대 초만 해도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폐병에 걸려서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가서 약을 타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건소에 가면 폐병 치료약을 무료로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약을 타러가지를 않습니다. 약을 먹어야 병이 낫고, 병이 나아야 구걸이라도 하여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인데 약 타러 가지를 않습니다. 달동네에서 목회하는 전도사님이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분들에게 “왜 약 타러 안 가느냐? 거저 주는 약도 타먹기 싫으냐?”고 나무랐더니 그들은 “보건소 놈들 아니꼽고 더러워서 차라리 약 안 먹고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약 타러 안 가더랍니다. 그렇게 자존심 상해하며 약 안 타먹다가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는 가난한 사람의 이런 여린 자존심을 헤아려 배려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돕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느냐고 짜증스럽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 때에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곡식과 과일을 다 추수하지 말고 버려두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을 가마니로, 과일을 상자로 나누어 주라고 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어 줍게 하라고 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여린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베려하심입니다. 추수가 끝난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은 도적질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고 나름대로 노력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가난한 자를 위하여 곡식을 버려두면 그들은 도움을 받으면서 도움 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자존심 상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한국도 점점 복지 국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1998년도 7.4%였던 정부 복지 예산이, 지금은 10%로 늘어났고, 지방 자치 단체의 복지 예산을 다 합치면 26%가 복지 예산으로 지출되고 있다고 합니다. 2030년도에는 복지예산이 46.7%로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정부가 집행하는 복지 예산은 세금을 거두어 집행하는 것이기에 거두는 비용과 나누어 주는 비용이 낭비되고 또 구제대상이 아닌 사람들이 돈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 부작용이 큽니다. 차라리 개인이 세금을 덜 내고 그 돈으로 개인이 이웃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면 세금을 거두는 경비도 절약되고 나누어 주는 경비도 절약되어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하는 구제보다 정부가 하는 구제가 받는 자의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합니다. 도움을 주는 주체가 크면 클수록,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존심이 덜 상합니다. 개인이 도움을 주는 것은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기관, 기관보다는 연합체, 연합체보다는 정부가 주는 것이 도움 받는 사람에게 부담이 덜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돕는 것보다 가난한 자 입장에서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형편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로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계를 보면 교단보다는 노회가, 노회보다는 개 교회가, 개 교회보다는 개인이 하는 쪽을 선호합니다. 이런 구제는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경계하신 나팔을 부는 선행이 되어 하늘의 상이 없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구제가 아니라 주는 자 위주의 구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는 한국 교회보다 이런 점을 어느 정도 시정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교회들은 선교를 하거나 복지 사업을 개 교회보다는 교단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단은 개 교회주도로 선교와 복지사업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자기를 파송하는 교회의 선교부장이나 담임 목사에게 본의 아니게 굽실거리는 입장이 되고, 매우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선교지를 돌아보고 열악한 형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말 못하는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서 효과적으로 도움을 주는 목사님들과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여간 부담이 큰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도움을 주는 물질이 도움을 필로로 하는 사람에게 잘 전달되어서 바르게 쓰이고만 있다면 도움을 주는 개인이나 교회는 가능한 한 도움을 받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교회가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여 몇 푼의 돈이나 옷가지나 쌀부대를 전달하면서 고아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원장에게 전달식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짓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아들이 그런 때 가장 많은 상처를 입는다고 합니다. 많은 고아들이 경험을 이야기할 때 그런 경우를 가장 혐오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도움을 주고 사진을 찍고 또 그것을 신문에 보도하게 하는 짓은 하나님의 명령을 노골적이고 뻔뻔스럽게 거역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상처도 함께 줍니다. 그래놓고는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구제했노라고 자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그런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구약의 보아스나 기찻길 옆 석탄 공장 주인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순종하여 가난한 사람을 돕되 도움 받는 사람이 도움 받는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도록 도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 2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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