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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의 관용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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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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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아서 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 싸움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다가 참패를 당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언약궤를 자기들의 신인 다곤신전에 두었더니 다곤신상의 목과 팔과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궤로 인하여 불레셋 진영에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자 겁을 먹고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던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에서 행진할 때나 전쟁을 할 때 언제나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갔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며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윤리적으로 잘못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에서가 아니라 언약궤를 우상처럼 사용하다가 그런 낭패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불레셋 또한 언약궤에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들의 신전에 두었다가 재난을 당하였습니다. 불레셋이 언약궤를 우상화 하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우상화 한 것은 우리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상대주의의 담론이 넘실대며 높은 교회 종탑 꼭대기를 비웃습니다. 교만한 상대주의는 종교와 과학의 세계를 싸잡아 얕보고 있습니다. 뉴턴은 절대공간을 상대적 공간의 근원이며 기준이라 하여 절대가 없으면 상대가 없다고 했다는데 오만한 상대주의는 뉴턴의 과학과 함께 하나님도 비웃고 있습니다.

상대주의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관용입니다. 상대주의는 관용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가 부정되면 상대적인 것이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관용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용은 더 나은 것과 못한 것의 구별을 없애버렸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든지, 혹은 어떤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있어야 더 나은 것과 못한 것의 구별을 할 수 있을 텐데,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더 나은 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든지 길게 기르든지 배꼽을 내놓든지 엉덩이를 내 놓든지 코걸이를 하든지 혀걸이를 하든지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든지 노랗게 물들이든지, 이렇게 하는 것은 건전하고 저렇게 하는 것은 불건전하다고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자기에게 좋은 것이 건전한 것이고 선한 것이고 옳은 것입니다.

요즘 젊은 가수나 탤런트들의 머리를 보면서 머리 손질할 필요가 없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다가 일어난 것 같은 머리 모양인데 그것이 자다가 일어난 모양 그대로가 아니고 손질을 한 모양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바지에 구멍이 나면 창피해서 꿰매어 구멍을 메워 입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찢어서 입고 닳게 해서 입습니다. 그것이 멋입니다. 이런 시대정신과 가치관에 대하여 어른들은 그런 것이 왜 나쁜 것인지 설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한데 어째서 좋지 않은지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합니다.

뭐든지 자기가 좋은 대로 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모양이나 옷 입는 것이나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것에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패튼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舅매같?됩니다. 상당히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머리색이나 배꼽걸이나 의상까지는 포기하듯 양보를 한 듯 합니다.

문제는 혀걸이나 배꼽걸이나 머리 모양이나 머리 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있습니다. 그런 것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동성애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직은 한국인들에게 동성애가 강 건너 불구경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미국 사회가 동성애를 문제 삼는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아주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동성애를 가지고 문제를 삼느냐는 식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맨해튼에 짚신 신고 갓 쓰고 나타난 사람 보듯 합니다.

관용은 인간의 연약함이나 불완전함에 대한 배려로서 소중한 것입니다. 옷을 뒤집어 입는 것이나 바로 입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나 남자와 결혼 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건전하다고 할 수 없이 모든 것이 다 정당하다고 하는 관용이라면 이 관용은 인류에게 이로움을 주기보다 엄청난 해악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하겠습니다.

관용은 본래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죄인에 대하여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관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형제가 잘못을 하더라도 일흔 번식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말썽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관용으로 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관용의 정신이 교회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짓밟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물리적으로 핍박하고 말살하려 하였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 사랑과 관용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물리적 힘을 갖게 되자 사랑과 관용을 버렸습니다.

이제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독교의 정신인 관용을 훔쳐(?)갔습니다. 불레셋이 이스라엘에게서 언약궤를 빼앗아 갔듯이 상대주의는 교회에서 관용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제 교회는 관용을 잃어버려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상대주의는 관용을 오용하여 인류를 위기로 내 몰고 있습니다.

관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 역사가 깊습니다. 관용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주후 50-60년 경에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가 관용의 정치를 하도록 하기 위해 쓴 “관용론”이 있습니다. 1532년에는 종교 개혁자 칼빈이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프랑소와 1세가 프랑스 안의 개신교도인 위그노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썼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John Lock도 “종교적 관용론”을 썼습니다.존 로크는 서양의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이론을 구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제2정부론」(Second Treatise on Civil Government)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미국과 프랑스의 공화국 창시자들의 정치철학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립선언서와 미국의 헌법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등등의 구절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거의 존 로크의 「제2정부론」(Second Treatise on Civil Government)에서 글자 그대로 따 온 것들입니다.

존 로크도 초기에는 비국교도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퀘이커 교도들과 같은 종교적 열정주의자들에 대해서 단호한 불관용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로마 교회와 영국국교회는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므로 자유주의적인 관용론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종교적 관용론은 후에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의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하게 관용론으로 교회를 공격한 사람은 불란스의 철학자 볼테르입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관용론은 인문주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영향을 끼쳤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인문주의자들에게는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용론은 그의 모든 철학과 함께 하나님과 교회의 권위를 제거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리 오용의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부쩍 이 관용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상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상대주의는 교회에서 훔쳐(?)간 관용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용을 빼앗긴 교회의 실수를 반성해야 하고, 상대주의가 관용을 오용하므로 인류에게 끼치는 해악도 막아야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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