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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구원의 서정(序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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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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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오래 전 아멘넷 게시판의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 적이 있다.

(무조건 성령 받으라는 게 뭐하라는 겁니까? 기도하고요? 부흥집회 참석하고요?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성령 받게 된다면 수천 번도 더 받았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를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령이 저에게 임하셨다고 1초 만에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던겁니까? 제가 바보라서 그런지 제 믿음이 거짓인 것인지, 제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지, 예수를 믿고도 여전합니다. 까칠한 제 성격을 바꾸자고 뭔짓인들 안 해봤겠습니까? 님은 저처럼 스스로에게, 남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고, 상처줌으로 인해 준 상처를 다시 돌려받는 악순환에 "주여 나를 죽여주세요"하고 기도해 봤나요?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정말 해결방법이 있다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써주세요. 님의 글은 저같은 사람에게 비웃음으로 들릴 수도 있답니다.)

그러고 둘러 보니 웹상으로 이곳저곳에서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참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되어 그 부분을 함께, ‘구체적으로’ 좀 다루되 신학적으로가 아닌,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질문자님께도 긍정적 해답이 되고 우리에게도 다시금 좋은 깨달음이 되도록 성령님의 조명 하심을 간구해 보면서...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이다. 사람의 영혼(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 중생(Regeneration)’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질문자의 말씀대로,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a) 회개(悔改, Repentance)가 있게 된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래서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①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죄로부터 떠나려면 먼저 죄를 죄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율법(롬3:20)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②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포함한다. 참된 회개는 상한 마음(시51:17)을 동반하는데, 사람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③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포함한다.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캄’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뜻으로, ‘슈브’는 ‘돌아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 ‘메타멜로마이’ 역시 ‘뉘우치다’는 뜻으로, ‘메타노이아’는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웨스트민스트 회개 중
 
b) 옛(육신적) 사람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전환(Conversion)된 여정이 시작된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하며 생활로 증거된다. 내가 마음에 예수가 구세주임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롬 10: 9-19절 참조),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요,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만만에 콩떡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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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2013-08-01 05:59
 98.xxx.204
 《Re》웅대한돌산 님 ,

반갑습니다.
물론입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으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위는 셋이나 본질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창조 때 뿐 아니라 창조 이전에도 계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본질이며 본체시죠. 창조 때에 함께 하신 성령님, 창조 때에 말씀으로 함께 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 1장 참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 그 몸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성자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쳐주시며 그 나라에 가기까지 이끌어주시는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통교단에서는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보혜사로 오신 성령 하나님이 따로 또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성령님이시나 사역을 다른 방향에서 하시는 것이죠.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침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 4-6)

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는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만...지금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시간이 아님을 이해해 주세요. 지금은 구원의서정이 어떠한가 말씀드리는 것이랍니다.이해가 잘 되셨기를..^^

다음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 론 중에서 일부입니다. 정통교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도움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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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기로는 영원한 삼위 하나님의 구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에 관하여 성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영어에서는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계신다’라는 말뿐이다"라고 에드워즈는 진술한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성령을 "삼위일체에 있어서 세 번째 위격(the third person in the Trinity)"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또한 에드워즈는 다른 위격들에게 신적 본질(또는 신적 속성들)이 귀속되듯이 성령께도 귀속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나누어지지 않고 독립적인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성령께서는 두 다른 위격처럼 영원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이심을 말하였다. 또한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처럼" 동일한 실체,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셨으며,"신적 본질에 속하는 완전성, 위엄, 혹은 탁월성"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인식하고, 사랑하고, 이 인식과 사랑을 자기 반복하며, 그렇게 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시다고 한다. "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 중에서
 
     
 
 
 

짐보 
2013-07-30 16:33
 207.xxx.194
 잘 설명하신 성경 이치(理治)에 합당한 글이라 추천 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분(독자)의 절박함에
 교회가 그 절박함을 도와주고 해소하고
 소망에 이룰 수 있는 답을 드려야 하는데
 그 분의 입장에서 추측해보면서
 그분의 현실과 교회의 현실적인 실상에
 댓글 한번 달지 못했던 기역이 납니다.
아니 댓글을 쓰려고 댓글의 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다가
 지켜본 날의 쓸쓸함이란...
자유게시판에 두 해 전인가 읽은 댓글
 가난한 교회 목회자의 재정에 고통스러워하시던 기억과 더불어
 동참치 못한 어리석고 못난 한심한 기억이 되어
 답답함으로 닿아오는 날입니다.

별님의‘구원의 여정’이 믿음 생활의 시작이라면
 믿는 자로 신앙인이 추구해야할 태도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예수님의 복음에 녹아 있고
 성경을 읽으며 또 깨달고 깨달은 공의는
 정의고 공평이고 평등이고 인애 등이라
 저를 분별하는 기준의 척도(尺度)고
 상대를 분별하는 공평한 추 요
 교회를 분별하는 근본이요
 세상을 분별하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는
 반기독교적인 집단의 헐뜯기라기 보단
 공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형 교회되고 화려하게 치장한 웅장한 건물이더라도
 작은 개척교회 조차
 공급하시는 힘의 근본인 공의를 잃어버렸기에 허약한 체질이라
 조직에 의한 조직을 위한 조직의 안위에도 안절부절 이라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 기초적인 그리스도의 정신적인 문화
 공의 의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개혁하기 보단 자기들 변화(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세상은 질타하는데 자기들만 모르는 문제를 양상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생산 재생산 합니다.

그런들
 백번 회개하면 뭘 합니까
 자기 스스로 낮아 지지 않고 교만한데.
진정 하나님 앞에 낮아지면
 교인이 형제자매로 닿아와 서로 사랑하고
 교회와 교회가 교통하고
 교회와 사회가 소통하면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텐데...

백번 기도원을 다니면 뭐 합니까
 자기 복만 빌고
 도저히 형제자매를 알지 못하는데.

백번 예배를 드리면 뭘 합니까
 생각의 사고가 변하질 않는데.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고함치고 울고불고 찬양을 해보아도
 믿음보다 앞선 감정(감성)의 예배를 받아 주실 리 없습니다.
믿음이란 기관의 기차가 감정이란 화물칸의 기차를 견인하지
 화물칸의 기차는 기관차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별님은 제 자매입니다.
 (자랑스러운 자매지요)
여기서(아멘넷에서) 닉을 쓰고 본명을 쓰지만
 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분을 부르기 이 전에
 형제자매라는 인식이 우선되면
 직분에 얽매일 필요도 예민할 필요도 없을 텐데
 어찌 보면 안일 화된 종교화된 일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직분은 교회 일 하라는 직무의 부름일 뿐 계급이 아닙니다.
공의가 사라진 교회에서는 직분이 계급이 되어
 당회가 세상처럼 상위기관이 되면 관료화가 되고
 한 생명 생명이 귀중함 보단 재정의 소모품으로 변질되어
 조직을 위한 조직원이 되면
 그 조직원은 교회를 위한 교회만을 위한 사람이 되어
 교회에서만 교인인 교회 밖에서 한 푼도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 교인이 되어 자기 축복만을 구하는
 구걸하는 신앙인으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10여년 포도나무를 기르니 포도나무를 어떻게 관리해야
 풍성한 포도가 열리는지 알았습니다.
포도나무가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그, 시, 기, 에 가지를 쳐주어야
 다음해에 포도가 더 많이 열립니다.
그렇듯이 제 안에 나쁜 습성과 버릇 사고를 잘아버려야
 올바른 신앙인이 되어 열매를 맺는.
이제 버림을 받는 가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제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풍성한 포도를 맺듯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계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힘든 분들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되어
 서로 위로하고 도와 의 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공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이 되어
 믿음의 여정에 형제자매가 되기를 꿈꿉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4]
 
    짐보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습니다.
저의 침묵은 제 나름 묵상,경견의 시간입니다.
저를 지키기 위한 습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가들은 인간의 역사가 반동(reaction)의 역사라 그러지요.
어느 정도 수긍합니다.
영국의 국교에 반동으로 생겨난 quaker도 그렇게 이해할수있겠지요.
한인교회에서도 한국교회에서도 그렇게 반동적으로
다른 형태의 교회가 생겨날수도 있겠지요.
변절된 반동으로...
 7/31 20:54
 71.xxx.35
 
 
잠긴동산 
2013-07-30 11:25
 67.xxx.142
 역시나  별똥별 님! 다운 칼럼 입니다
 로고스의 말씀을 잘 대변하는 칼럼에 +10추천 들어 갑니다!^^

중생한 성도로서 “구원의 서정”을 잘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그렇게 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함이 성도의 당연한 분분임에도 불구하고 원로교인들 중에서도 여전히 성도의 category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입니다.

헌금생활은 적당히? 전혀 참여하지 못합니다
 봉사생활도 적당히? 목사님을 기쁘게 하기위한 수단 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 빠져나가기 맡아놓고 탈랜트를 발휘 합니다
 몇십년을 꾸준히 예수님의 포도가지에는 늘 붙어 있는 듯하나
 염소노릇, 가라지 전문노릇으로 포도나무 잎을 갉아먹으며
 포도원에 구멍내는 여우짓은 골라 합니다.
그러한 교인들은 울어도 못하고
 귀신나가라고 꽁꽁묶어 몰매를 주어도 못할 것입니다.

오늘의 질문자가 혹 이러한 자가 아니일런지요?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을 때 없이 뛰며 받는 성도도
 개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거든요?!?!?! ㅎ ㅎ ㅎ

 교과서적인 답변도 좋기는 합니다.
질문자의 지(知), 정(情), 의(意)를 온전히 장악할만한
 영을 살리는 답변이 필요 합니다!^^

좋고좋은 말만이 성도의 언어로 인식하고 있는 판에서
 잠긴동산, 청개구리식 기질이 다시 발동하는가 봅니다 ㅎ ㅎ
 
 
 기자석 
2013-07-30 06:44
 65.xxx.228
 별샌님^^
 "구원의서정".... 이란 멋진 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초생달 
2013-07-30 03:05
 121.xxx.110
 별 선생님은 역시나 훌륭하신 아멘넷의 별똥별 선생님 입니다.
예리하고도 이성의 한계를넘어 영적이면서복음적인 질문이십니다.
차근차근히 설명을해주신 님의 칼럼 감동이었습니다.
초생달 역시 깊은 감동과 동시에 귀한 깨달음을
 안고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모-든  분들의 경독을 바라는의미에서 추천 꽝드리고 가겠습니다.
 
  니고데모 
2013-07-29 22:12
 69.xxx.32
 요한복음 3:3~8 말씀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 줄 압니다. . borm of water and of the Spirit 에 대한 해석에서 물=말씀이란 견해는......글쎄요?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one is born again, he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  4Nicodemus *said to Him, "How can a man be born when he is old?  He cannot enter a second time into his mother's womb and be born, can he?"  5Jesus answered, "Truly, truly, I say to you, unless one i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he can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6"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7"Do not marvel that I said to you, 'You must be born again.'  8"The wind blows where it wishes and you hear the sound of it, but do not know where it comes from and where it is going; so is everyone who is born of the Spirit," (John 3:3-8).

 There are five basic interpretations to this section of scripture in reference to water.
 1.The water refers to the natural birth.
 2.The water refers to the Word of God.
 3.The water refers to the Holy Spirit.
 4.The water refers to the ministry of John the Baptist.
 5.The water refers to the water of baptism as a requirement for salvation.
 
 별똥별  니고데모님께서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고데모님께서는 번역도 잘 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고요.
제 방에는 서울에서 들어오시는 분들도 많으시고
영어를 잘 하시는 분, 영어를 습득하시지 못한 분도 계시거든요.
번역까지 해주시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다는...^^
다른 분들을 위해서 부족한 제가 다른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대충 번역해 보았습니다. 부족한 점은 보충해주십시오.^^ 7/30 04:30
 98.xxx.204
 
 별똥별 
물을 참고로 성경의 이 부분에 대한 다섯 가지 기본 해석이 있습니다.
1.그 물은 자연 출생을 의미합니다.
2.그 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3.그 물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4.그 물은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5.그 물은 구원을 필요로 물 세례(침례)를 의미합니다.
거듭남을 말씀하실 때, 모든 물을 다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2번이 거듭남의 의미로서 정확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깨닫게 해주신 부분을 함께 나눈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뜻은 무궁무진하고, 주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은총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반드시, 그 범위는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여야만 합니다. 광의적 해석에 접근할 수 있도록 자료를 올려주심 감사드립니다.^^
 7/30 04:31
 98.xxx.204
 
 기자석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거듭남(born again)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벧전1: 23절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따라서 born of water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수도 있겠고,
혹은 "물침례"로 보아도 무리가 아닌 듯 싶습니다.  7/30 06:43
 65.xxx.228
 
  67.xxx.142
 
  니고데모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 말씀하여 주셔서 보기에 넘 좋습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선행을 격려하는 형제, 자매라 불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저의 댓글 중에서 5번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꼭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는 세례가 구원의 요건입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세례가 아니라 오직 믿음만 필요할 것입니다. 잠긴동산님, born of the Spirit 를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7/30 21:00
 69.xxx.32
 
 
 잠긴동산 
기자석님! 그래요!
신앙고백 타자 1번 접수 입니다요.
기왕이면 양식대로 성령세례까지 소개하시면
고맙고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그 다음타자도 지명하여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
.
니고데모님!
성경을 보십시요. 니고데모 선조께서는 2000년이 지나도록 20세기 이 시간까지도 아리송하시다는데 미천한 제가 어찌 그만한 득도를 할 수 있겠는지요?! ㅎ ㅎ ㅎ
.
니고데모님!
[성령의 오심이 중생과 동시에 임하시는 불가분의
관계인가 아니면 별개의 분리적 관계인가?]
.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실 작정이신지요?
니고데모님의 수고로 탄생한 이만한 정리를
2000년 역사에서 찾아볼 수가 없거든요.
.
정리에 걸맡는 결말이 있어야 하지않겠는지요!^^ :) 8/2 12:02
 67.xxx.142
 
     
 
 
 

누지문서 
2013-07-29 11:01
 96.xxx.195
 역시 별똥별님이십니다.

교계가 어지럽고 혼탁해지며
 그에 따라서 거듭남과 구원에 대한 이설이 성도들을 혼탁하는
 이 시대에 시기적절한 칼럼글로 경종을 주십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체르니 
2013-07-29 09:28
 115.xxx.16
 안녕하세요. 별사모님^^
요사이 제 마음이 너무도 복잡하고 심란했는데 글을 읽으며 제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읽고 생각하고 다시금 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셔서요.^^*
 
 믿음은 
2013-07-28 20:39
 119.xxx.126
 아멘입니다!~
독자의 질문에 합당하게, 일목요연하고도 쉽게 잘 설명해 주셨네요.^^

구원의 서정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신앙에서 참으로 중요하지요.
성도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종으로 살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기에, 별님께서 자세히 설명하신 '거듭남'이 구원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귀한 말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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