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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없는 평화가 불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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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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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에는 수많은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은 누가 가상의 인물이고 실제 인물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작품의 탁월한 점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톨스토이는 인간 영웅을 부정합니다. 그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입니다. 작품 속에는 그 전쟁을 수행하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고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군 사령관인 미하일 쿠투조프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역사관을 쿠투조프라는 인물에 투영(投影)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자신이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전쟁 도중 연락장교들을 수시로 현장 지휘관들에게 보내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내립니다. 그런데 그의 지시는 지휘관들에 의하여 오해되거나 상황이 바뀌어 쓸모없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역작용을 만들어냅니다. 반면에 쿠투조프는 자신의 한계, 전쟁 중 최고 지휘관의 한계를 잘 압니다. 그래서 사령관으로서 대략의 전투방향과 임무만 부여하고 나머지는 부하들이 현장에서 알아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 줍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항상 바쁘고 쿠투조프는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쿠투조프는 전투 중 줄곧 막사에 앉아 있고, 심지어 걸핏 하면 꾸벅꾸벅 졸기까지 합니다. 쿠투조프는 역사와 인간에 대해 매사에 겸허한 자세로 대합니다. “전쟁과 평화”는 역사와 인간에 대해서 겸허한 자세를 지닌 쿠투조프가 오만한 나폴레옹에 대해서 승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구투조프는 모스크바라는 도시보다 자기 부하 군인들을 아꼈습니다. 실제로 부하 군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나플레옹 군대에게 내어주면서 변방으로 퇴각합니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와 언론과 국민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구투조프의 판단이 적중하였습니다. 구투조프는 프랑스 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기 전에 보로디노에서 치명타를 입히고 변방으로 퇴각하였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사력을 다해 모스크바 점령에 성공하지만 급격히 힘을 잃고 맙니다. 게다가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한 달여간 모스크바에 머물다가 스스로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퇴각하게 됩니다. 구투조프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이 기름진 땅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그들이 점령해 오면서 폐허로 만들었던 길을 따라 퇴각하도록 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망가는 프랑스군을 폴란드와 프로이센까지 추격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쿠투조프는 러시아 군대에게 패잔병들을 너무 무모하게 추격하지 말도록 자제시켰습니다. 도망가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데도 러시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술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이라면 누구나 최후의 순간까지 사력을 다하여 고지(조국)를 사수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부하 군인을 아끼고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포기합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통해 평화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고 쿠투조프는 전쟁 자체를 평화의 방법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을 통해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쟁도 평화의 방법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해도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이익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업가는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업가는 이익과 성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가치관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교회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을 통해 평화를 얻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논리이고 팍스 로마나의 가치관이고 현대정신입니다. 가치 질서가 완전히 뒤집어진 것입니다.

세상에는 전쟁이 끝나도 평화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전쟁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톨스토이는 평화를 실제 전쟁과 대조시킨 것이 아니라 전쟁 중의 평화와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삶을 전쟁을 수행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가 능히 대처할 수 있다고 믿었고 쿠투조프는 평화의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 없는 평화란 불가능합니다. 이런 주장은 아직도 논쟁 중에 있습니다. 평화를 전쟁 없는 상태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런 주장에 동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쟁 없는 평화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수행할 것이 아니라 평화의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로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평화의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평화의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CNN 뉴스는 팔레스타인 희생자가 827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엔이 중재에 나서고 세계 여러 나라가 염려하며 안타까워해도 그들은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싸움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명분이 없습니다. 서로 싸움의 원인이 상대방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싸움은 원인 제공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 때문에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어린아이들이라면 아버지가 “싸우지 마!”라고 큰 소리를 치면 그칠 것입니다.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면서도 아버지가 무서워 싸움을 그만 둘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에게는 그렇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스스로 싸움을 그만 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원리가 평화라고 합니다. 싸움을 그만두는데 평화의 원리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아무리 해도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면 쿠투조프처럼 인명손실을 최소화 하는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상황이 바로 인명 손실을 최소화 하는 싸움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쪽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이 구체적 상황에 성도의 지혜와 경건의 능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다운 모습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싸워도 신자답게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여기가 우리가 한계상황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신자답게 싸울 능력이 없고 그럴 수준도 못됩니다. 인내, 관용, 용서, 이해, 사랑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좌절하거나 타협합니다. 이해, 용서, 평화, 사랑의 원리가 아니라, 그런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내 식대로 해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태도와 자세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전쟁, 갈등, 싸움, 고통, 어려움 등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평화가 그런 것이라면 인간의 역사나 삶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전쟁 보다는 전쟁 없는 상태가 더 평화로운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나 고민이나 고통이 같은 것이 심할 때보다 덜할 때가 더 평화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적인 환경이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상태로 평화를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런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조건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물리적 조건에 의해 우리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서 얻는 평화나 행복은 물리적 조건에 의해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물리적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 평화로 지켜 주시고, 평화의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이성과 논리와 현실을 초월한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 평화를 순간순간 경험하며 살 것입니다. 전쟁과 갈등과 고통과 시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가운데서 우리를 지키시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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