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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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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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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생명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생물학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생명입니다. 생물학적 생명도 설명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영적 생명은 더욱 신비로워서 설명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명을 해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 생명에 대해 말씀하셨고 성경 저자들이 성령을 힘입어 설명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역시 신비로울 뿐입니다. 성경은 영적 생명을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영적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경우가 있고 생물학적으로 죽었어도 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생명을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 11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와 그를 믿는 자들의 영적 생명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죄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요 16:9절). 이 말씀을 뒤집으면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목적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늘 생각하고 하나님께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깊고 교회 활동에 열심이고 예배와 헌신에 남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비추어 사려 깊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영적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풍성한 영적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헬라 철학자들과 논쟁하게 됩니다. 그들과의 논쟁에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존재임을 천명합니다(행 17:18-29). 생명 없는 철학적 호기심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영적 생명에 관한 바울의 설명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4, 25절). 시편 기자는 천지 만상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그분의 명령에 순복한다고 노래하였는데(시 104편), 그렇게 볼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음이 영적 생명의 풍성을 누리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과 동시대인입니다. 이 시기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었는데, 남쪽은 유다 왕국이고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입니다. 아합은 북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북 왕국의 태조인 여로보암 이후 오므리라는 왕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오므리 왕조의 둘째 왕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아합입니다. 아합은 신앙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따르려고 노력을 한 것 같은데, 그의 아내에 의해서 아주 나쁜 왕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잘못된 결혼으로 신세를 망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두로의 여왕 이세벨이었습니다. 그녀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에는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알의 사제들과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늘 다투었는데 그 양쪽의 싸움이 극에 달한 사건이 왕상 18장에 나오는 갈멜 산 대결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백 명과 엘리야 한 사람이 맞붙었는데, 결과는 엘리야의 통쾌한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엘리야가 그 대결에서 승리는 했지만 그로 인해 이세벨에게 더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든지 아예 죽을 작정까지 하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상인 바알의 능력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이는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지금 기독교인들 중에 바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좋아할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선호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우상숭배를 한 게 아닙니다. 바알은 우상이지만 또한 아주 매력인 이데올로기(이념, 사상)입니다. 그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인생을 살맛 나게 해줄 것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바알 우상은 지금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해 주는 약속들을 거부하기가 힘듭니다. 비즈니스의 성공, 노력한 만큼의 보상, 자녀의 성공, 안락한 노후 보장, 자유로운 여행, 개인적 꿈 실현 등이 모두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보상들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안에 이런 것들보다 질적으로 나은 보상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나님은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약속들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보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나 믿음의 선조들의‘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비록 무화과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어도’등의 고백은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살리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자본주의적 가치를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를 영적 생명으로 오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대적 의미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자본주의적 가치를 보장하는 분으로 바꾸는 것이 바알인 셈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이후 이와 같은 경향은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바알은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학문이나 지식이나 예술, 또는 국가일 수도 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재물입니다. 재물의 힘은 현대인들에게 하나님보다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무조건 악하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들을 거부하고 그런 것과 관계를 끊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절대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로부터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적 생명은 가능한 한 자본주의적 가치를 상대화시키려고 노력 합니다. 그런 것들도 믿음 안에서 귀한 것들이지만 우리가 받았고 맛보고 누리고 바라는 것은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하고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8:18절)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선교와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이 어떻게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도 신앙 자체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 우상, 예수 우상이 지금 기독교 안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살리시는 능력을 눈여겨보고 그 하나님의 일에 우리의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영적 생명을 사람들의 오감이나 인지 능력으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딱 거머쥘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상은 성령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만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살리시는 능력은 누구의 설명으로가 아니라 각자가 직접 스스로 경험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차원과 방식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까마귀가 동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언제나 8백 명의 바알 제사장들과의 대결에서 통쾌한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루 통에 가루와 기름병에 기름이 먹어도 줄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한 편으로는 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땀 흘려 땅을 경작하여 농사짓고 목축하고 자존심 내려놓고 비즈니스 하는 삶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우리를 살리시는 능력이지만 토목공사를 통해 건설한 워싱턴 브릿지를 건너게 하시는 것도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살리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능력으로는 바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리시는 하나님께 모든 관심과 역량을 집중하여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확증하며 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엘리야를 그렇게 살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그렇게 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 시 33: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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