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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복종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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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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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이고 인간의 생각은 상대적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상대적인 인간은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정치를 신정이라 하고 상대적 인간의 생각들 중에 어느 것이 진정 인간을 위하는 것인가를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입니다. 그러나 12세기까지는 일정한 법적경계 안에 위치한 단일 국가는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고 하는 견해가 우세하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신정적 개념은 쇠퇴하고 국가는 인간의 천부적 사회성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단지 원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와 같은 사상이 오히려 종전의 군주를 제한해 왔던 봉건적 결속을 와해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어 프랑스 군주제는 절대주의의 성격을 나태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5세기에 프랑스 의회는 왕이 지고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왕의 위엄을 침해한 죄이기 때문에 이교도로 처리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위정자에게 저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에 의식 있는 자들이 반발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재세례파들의 저항이 심하였습니다. 재세례파들은 위정자의 직무를 세속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통치자에게 무조건 저항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그렇다고 절대군주의 폭정도 묵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의 딜레마였습니다.

성경은 국가의 통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합법적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국가와 통치자의 권위에 복종할 수만은 없습니다. 백성은 불의한 통치자에게도 복종해야지만 무조건 복종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정자에게 칼을 들려 주셨지만 그 칼을 권력 남용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까지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국가질서의 기원은 창조주 하나님이고 그것은 단지 타락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조치가 아니라 우리의 현세적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귀하고 소중한 복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타락한 세계에 살기 때문에 이 기능은 많은 점에서 부정적 수단에 의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즉 억제, 강제력 심지어는 극단적으로 전쟁에 의해서 바로 잡는 것도 국가의 기능입니다. 물론 위정자에게 주어진 권력은 죄에 대한 형벌을 시행하는 것으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안녕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을 구속(拘束)하는 법이 없고 그 성문법을 시행하는 위정자가 없다면 우리는 무질서 가운데서 악인의 광포로 인해 약자들과 죄 없는 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전체적인 파괴가 초래될 것이기에 법과 위정자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위정자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려지는 존경이 하나님 경외와 이웃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세워진 질서를 사랑하며 통치자들에게 마땅한 존경과 복종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를 경멸하거나 마음으로라도 이들의 존엄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정자의 명예는 그들 자신의 어떤 우월한 자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에게 권위를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위정자의 폭정이나 강제에 의한 복종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가 정치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선거이기 때문에 지도자는 피지도자들의 승인에 의해 다스리는 자이기도 합니다. 국민 공동의 동의에 의해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 할 수 있을 때가 최상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나 교회나 동일합니다. 누구든지 힘으로 최고 권력을 찬탈하면 그것은 폭정이고, 정당한 법질서가 무시된 가운데 지도자가 세습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이 같은 다스리심을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소명과 그에 따르는 의무를 지닙니다. 정치가 세속화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정치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정치적 권위는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영예롭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이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명령과 부모로서의 소명이 가지는 책임은 정치적 영역에 그대로 적용해도 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여한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수단이며 은총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우상숭배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이나 진리에 대한 훼방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공공연하게 방해하지 못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하고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가 가능하게 하며 정직과 겸양의 덕을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일군으로 세움 받은 사람은 고결함과 슬기와 온유와 극기와 결백에 대해서 열성과 최선을 다해야 하되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의식으로 하나님의 대표요 대리인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속성과 이름을 지도자들과 나누시며 그들에게 자신의 찬란한 빛을 비추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는 지도자들도 한 사람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하나님께 대한 책임과 의무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통치에 있어서 위정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법률입니다. 법률은 국가의 가장 튼튼한 힘줄이며, 키케로는 플라톤을 따라서 법률을 나라의 영혼이라고 불렀습니다. 법률이 없으면 집권자의 지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집권자가 없으면 법률에 힘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위정자에 대한 복종과 법률의 필요성은 상치되는 것 같으나 위정자의 권위는 법률의 질서에 의해서 지지 되는 것입니다. 그 법률은 그것이 신적으로 계시된 법이건 자연법이건 아니면 실정법이건 모두 하나님에게만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사회라는 유기체를 지탱하는 것은 위정자가 아니라 법률인 것입니다. 국가질서는 법률에 의해 만들어지고 국가는 법률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한 국가가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인간 조직이 법률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러한 법률의 원리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과 개인 간에 법률에 관한 불변한 일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씨앗들이 선생이나 입법자 없이 만인에게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각국에 있어서 법률이 세부적인 차이를 가지는 것은 분명하나 형평이라고 하는 일반적 개념은 모두에게 공통적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타락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운데 나타날 수 없을 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일반은총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인간은 십계명의 요구에 적대적이 되었지만 그 계명의 요구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인간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부여 받았기에 금수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 가운데는 기계적 숙련, 예술과 과학뿐만 아니라 가정과 국가, 정부의 관리 능력도 포함됩니다. 자연이나 인위적인 것이나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지와 무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신적으로 제정된 창조 질서입니다.

위정자나 법률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저항의 정당성은 무엇일까요? 물론 저항은 지도자의 직무 태만과 전제적 통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복종과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의 원리를 정치 상황에도 평행적으로 정용해야 합니다. 복종의 근거는 부모 됨에 있는 것이고 선한 의지나 인격적 성숙도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저항의 근거는 “주 안에서”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 7절에 의하면 가이사의 명령이 가이사 외에 어느 누구도 임금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였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임금이라 불렸습니다. 주 안에서 위정자에게 저항 하는 이들은 위정자의 부당한 폭정을 당할 때 자신에게서 허물을 찾고, 그 폭정이 하나님의 선하신 명령은 아니지만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와 태도로서 저항은 당연히 질서를 따른 저항이어야 합니다. 위정자가 폭정을 행사하고 실정법이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은 합법적으로 질서를 따라 저항해야 합니다. 만약 저항이 불법적이고 폭력적이 되면 저항의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고 자기가 저항하는 그 불법을 자기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저항하는 자의 죄질이 더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37회 KAPC 총회는 개회 시작부터 몇몇 사람들에 의한 강한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저항자들은 회의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단상을 점거하고 의장이 사회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의장이 불법으로 회의를 진행하려 했거나 시비를 가려야 할 의제가 있다면 그 역시 그 회의에서 논의 하여 진위를 가리고 결정하면 될 것입니다. 회의가 열려서 문제의 사안을 결정할 때 수적으로 불리하다면 진정성을 가지고 사실에 근거하여 회원들에게 호소하면 될 것이고 그래도 승산이 없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항하는 이들은 회의 자체가 불가능 하도록 폭력적으로 파행을 저질렀습니다. 크고 괴악한 죄를 감추기 위한 계획된 행동이었는지, 질서를 따른 저항의 방법에 무지한 때문인지 모르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불법이 다반사로 저질러지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저항해야 할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다면 불의와 불법에 저항하고 항거하되 성실함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질서를 따라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다면 그것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나라 방법으로 불의에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 롬 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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