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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한 고난은 일상의 어려움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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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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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보스턴 마라톤 대회장에서 두 개의 폭탄이 터져서 3명이 죽고 180여명이 다쳤습니다. 부상이 심한 이들이 많습니다. 조카 성헌이도 친구가 마라톤에 참가해서 구경하러 갔다가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부상자들을 치료한 한 정형외과 닥터는 지금까지 온갖 부상자들을 치료해왔지만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폭발음이 들렸을 때 사람들은 축포를 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폭죽을 터뜨리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폭탄이 터진 곳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아비규한으로 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들은 평생 동안 그 충격과 슬픔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상을 당한 이들 중의 많은 이들은 평생을 장애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장애자를 인하여 그 가족들 또한 함께 아파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잊겠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많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들에 나가 일하다가 다쳐서 장애자가 된 이들이 많았습니다. 산에 나무하러 가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해서 불구자가 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 때는 지금에 비하면 문명의 해택을 100분의 1도 못 누렸습니다. 모든 것이 미개했고 낙후되었었습니다. 다쳐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의 의술이라면 충분히 치료하여 고칠 수 있었지만 의료 해택을 받지 못하여 장애자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학과 의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과학이 인간의 상상력을 좇아갔었는데 지금은 우리의 상상력이 발전한 과학을 좇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폰 하나 가지고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한 발명들을 우리는 100분의 1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통의 문제만은 과학과 의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극복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죽고 앞으로도 죽을 것입니다. 옛날에도 다쳐서 장애자가 되었고 지금도 다치면 장애자가 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온갖 편리한 것이 발명되어 우리를 편하게 해 주지만 고통을 사라지게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무관심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나 불신자에게나 구별 없이 찾아옵니다.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 같은 것도 다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당하는 삶의 어려움과 그리스도인이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사건이지만 거기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좇아야 할 삶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친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으라고 하셨고 사도들 역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애정 어린 교훈을 하였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고난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고난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고난은 힘든 세상살이 자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돈이 모자라고, 취직이 안 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아프고, 소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겪게 되는 어려움 등을 고난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것들이며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 고난은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을 헛되이 믿게 될 수 있고 또한 복음을 왜곡하게 되기도 합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예수 믿는 목적이 이런 어려운 세상살이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세속적인 욕망을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실현해보려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즉 기적으로 일상의 어려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인데, 믿음은 세상살이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 해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삼박자 구원입니다. 미국에서는 로버트 슐러 목사나 레이크우드 교회의 조엘 오스틴 목사 같은 이들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두란노 출판사가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한국에 소개하여 바른 복음 전파에 역기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엘 오스틴은 스스로 자기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에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굳이 복음이 아니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불신자보다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을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일상적인 삶의 어려움이 아니고 당시 유대 종교, 특히 율법주의를 지목하신 것입니다. 유산문제나 이혼 문제나 가난이나 질병이나 인생살이의 어려운 문제들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일상의 어려운 문제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은 일상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일상을 자기 욕망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것을 많이 가졌다고 그것을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없고 고통과 어려움이 겹친다고 그것을 반드시 하나님의 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훌륭한 시인은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시를 많이 써서 돈도 많이 벌면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시인이라면 돈 버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성공하여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공하지 못해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물론 훌륭한 그리스도인 중에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절대화하던 유대인들은 그것을 상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절대화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식쟁이, 또는 무신론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신으로 믿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적 배경에서 기독교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예수를 그리스나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 중의 하나로 주장했다면 로마인들이나 그리스인들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처음부터 다른 신을 부정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퀴리오스-κυριος’, 즉 ‘주’라는 단어를 예수님께만 붙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신앙은 로마의 황제 숭배와 완전히 대립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공공기관에 세워놓은 황제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무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외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때로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가 당시의 권력이나 시대정신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영적 긴장을 잃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이 시대와 잘 어울려 지냅니다. 장르를 넘나드는 ‘열린음악회’처럼 신앙과 문화와 가치의 장을 넘나드는 열린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팍스 로마나 이데올로기와 조화될 수 없어서 그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팍스 로마나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작동되는데도 아무런 어려움도 불편함도 겪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치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적으로 잘살게 해주겠다는 메시지에 쉽게 속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무한경쟁의 원리가 지금 교회 안에서 조차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맛 잃은 소금으로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겪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딤후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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