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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예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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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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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에는 로마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때의 로마의 권세와 힘은 황제 가이사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정치와 전쟁과 문화와 종교와 예술까지 가이사의 이름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가이사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이든지 가이사의 뜻이면 시행되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몇 명이 죽고, 누가 덕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느냐 하는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가이사의 이름이면 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자들이 곧 실세들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여러 지역에 파견된 총독이나 군인들은 못할 일이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일을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매사에 목숨을 담보해야만 했는데 가이사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못할 일이 없었고 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 때는 모택동의 이름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문화 혁명의 행동대인 홍위병들은 모택동의 어록이 적힌 조그만 소책자를 들고 다니면서 소위 四舊에 해당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 하였습니다. 구사상, 구문화, 구풍습, 구습관에 해당되는 자들에게 모택동의 이름은 곧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일본 천황의 이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권력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했던 자들은 한결같이 모든 사람들을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제한된 시대에 국한되기는 하였지만 상당히 효과 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 권력자의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정치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어서 지금도 사람들은 권력자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일에 대하여 여간하여 반기를 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권력자의 이름으로 무엇을 시행하는 자들은 대단한 위세를 부리고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웁니다.

지금 북한이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주도 세력이 김정은인지 아니면 군부인지 당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건 아직까지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이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아마도 김정은은 할아버지의 절대적인 위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번의 그가 조성하고 있는 위기상황도 그런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경우는 극단적인 것이지만 누구나 독재자의 절대 리더십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그런 유혹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지도자 뿐 아니라 학자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나 예술가들까지도 자기의 이름이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자기 말 한 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는 목회를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말은 안 하지만 그런 목회자를 부러워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지도력의 카리스마가 강할수록 말 한 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는 당회나 제직회 같은 것도 구차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분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준비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서 일을 했다면 결코 출애굽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리 정도는 어떤 주장에도 있게 마련입니다. 몇몇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들의 ‘회의는 짧게 기도는 길게...’라는 주장을 신령한 리더십이라 믿고 고개를 끄떡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기보다 인간 지도자의 권위를 세우려는 자신의 무의식적 의도에 속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절대적이고 강력한 리더십일수록 위험합니다. 그 예가 북한의 경우입니다. 북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효율 면에서 민주주의 사회 지도자의 리더십보다 백배 뛰어납니다. 그 매력에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의 고집과 이기심과 권위를 합리화 하게 됩니다. 현대정신과 가치는 효율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세상이나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김홍도 목사는 북한과 북한의 지도자를 가장 극렬하게 비판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목회는 북한의 지도자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그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의 지도력은 끄떡없습니다. 목회 세습이 비난 받는 현 상황에서 조차 세습예찬까지 하면서 세습을 거뜬히 해 치웠습니다. 많은 교회 목회자들이 그런 목회자를 부러워합니다. 한국에는 그와 비슷한 교회가 많습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정치와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모든 세력을 무력으로 평정하였을 때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유럽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은 미친 개 같은 독재자 무솔리니를 침을 흘리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모든 독재자는 모든 이의 무릎을 자기에게 꿇게 합니다. 무솔리니는 그런 면에서 당시 유럽의지도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목사는 절대 그런 리더십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마지막에는 모든 무릎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꿇게 될 것이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도 그와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어도 왕 노릇 하는 것은 ‘아직’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치 암행어사의 마패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코웃음 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해도 바로가 코웃음 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거침없이 일사천리로 척척 해결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면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시행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도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옥에 갇혔고 매도 맞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복음 사역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가이사의 이름으로 그의 뜻을 수행하던 자들은 두려울 것도 없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은 반면에 예수의 이름으로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은 온갖 불이익을 다 당하였습니다.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며,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위력을 떨치는 이름은 가이사의 이름이지만 십자가의 원리가 보여주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외면과 조롱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새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가이사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며 살아가는 자들과 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롬 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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