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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가룟유다의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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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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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은 인간주의, 인문주의, 인본주의라고도 하여 넓은 의미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사상이나 이론체계를 총칭합니다. 휴머니즘은 인류역사에서 사회와 국가 조직 및 학문과 문화가 성립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국가나 사회의 여러 제도들과 조직들이 형성되면 지배와 피지배, 객관적 제도와 개인적 욕구 사이에 괴리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인간 소외와 억압에 저항하는 흐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 시대마다 휴머니즘은 인간성 왜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휴머니즘은 그리스인들의 학문과 예술,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와 문화와 정치 법률 등에도 나타납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이 인간을 위하는 정신과 사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서나 인간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도 결국은 인간을 위하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휴머니즘은 도덕성이 결여된 샤머니즘과 광신적 종교행위 모두를 비판합니다. 휴머니즘은 최고의 가치 판단의 권위를 인간 이성과 합리성에 두기 때문에 종교적 진리도 이성과 합리성으로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성경에도 인간을 위하는 사상이 있지만 그것은 휴머니즘과 다릅니다. 휴머니즘은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판단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할 때 진정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게 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를 위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危害)하는 것이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진정 인간을 위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휴머니즘은 그 출발이 성경과 다를 뿐 아니라 반성경적 경향이 농후합니다. 휴머니즘이 왜곡된 종교행위, 즉 광신적 태도와 도적성이 결여된 샤머니즘을 비판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편협한 철학체계, 신학적인 도그마, 절대적인 추론 등을 배격하였습니다. 낡은 중세주의와 부패한 교회의 세속화 및 기타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에 맞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자연적인 인간성을 옹호하고 그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합니다. 그러한 정신은 인간이 합리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며 자연과 역사를 인간의 영역으로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운동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페트라르카는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르네상스 운동의 전개를 촉진했습니다. 그의 기여로 15세기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는 지적이고 예술적인 모든 분야들을 발전시켰습니다. 당시의 휴머니스트들은 교회의 내세주의적 세계관에 맞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옹호했으며, 기독교의 금욕주의적 교리와 규범으로부터 사회도덕을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운동은 15세기에 접어들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가져왔으며,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을 배출해냈습니다. 휴머니즘의 정신은 르네상스 운동이 확대되면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고, 이런 추세는 라틴어의 보편적인 사용과 인쇄술의 발달로 더욱 촉진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에라스무스는 복잡성과 중세주의적인 기풍을 혐오하고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기풍을 숭배했습니다. 영국의 인문주의는 15세기에 토머스 모어, 토머스 엘리엇, 로저 애스컴의 등장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모어는 전통적인 사회제도를 날카롭게 풍자했으며, 필립 시드니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르러서는 시학적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시드니는 인문주의적 이상의 살아 있는 표상이었고, 셰익스피어는 희곡을 통해 감정의 존귀함을 강조하는 인문주의적 경향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인간성을 탐구했습니다. 17~18세기에 이르러 휴머니즘은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뉴턴 등에 의해 발전된 근대 과학과 결합하였고, 프랑스에서는 몽테스키외와 백과전서파들에 의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계몽주의운동은 18세기말 독일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운동과 관념론 철학으로 이어져 고대의 인간성의 이념과 기독교 사상 및 근대의 계몽정신을 종합적으로 완성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궁극적인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휴머니즘이 제기하는 중심 문제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인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겪고 있는 소외의 문제입니다. 즉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복지와 문명의 편리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휴머니즘의 낙관적인 기대와는 달리 인간의 자율성과 개성이 억압되는 사태를 불러온 것입니다. 나치와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과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 등의 가공할 위력 등은 현대사회에서 인간과 인류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준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해서 현대의 휴머니즘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인종, 국경, 종교, 사회체제를 떠나서 전쟁에 의한 절멸의 위기로부터, 또한 과학의 폭력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러한 시도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은 사건이 나옵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위였기 때문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특히 제자 중 가룟유다는 그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고 예수님은 그의 주장을 가로 막으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유다가 진정 가난한 자를 위해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돈을 탐내는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쁜 놈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주장의 합리성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자들 중 재정 관리를 맡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할 만한 인물이고 또한 능력도 있는 인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막바지에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일어난 마리아의 순수한 헌신에 대해 자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만큼 용기도 있고 예리한 판단력도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 또한 평소에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그의 주장은 객관적으로 보면 옳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자는 유다의 주장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의 주장은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을만한 휴머니즘을 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식이 투철한 지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문제를 짚어내는 예리함을 지닌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2의 유다, 제3의 유다를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또한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제안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회봉사와 구제입니다. 교회가 자기들끼리만 종교적 만족감에 도취되는 것을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오늘날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을 힘써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들 중에 구제와 봉사에 열심을 내는 교회는 좋은 교회로 소문이 납니다. 노숙자들에게 직접 밥을 제공해주고, 장애인들을 지원하거나 남녀 선교회에서 집적 찾아가서 몸으로 봉사하기도 합니다. 모든 교회가 형편이 허락되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보면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교회가 구제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정부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정부와 경쟁하듯이 구제와 봉사에 치우치는 것은 교회 본래의 사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제와 봉사 사역은 정부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대신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혹시라도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교회가 구제와 봉사를 할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본질적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룟유다의 휴머니즘은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이고 사도들도 실천한 합리적이고 계몽적이고 개혁적인 것 같아서 매우 설득력이 있는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유념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교회는 그 일을 하기에 재정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국민이 세금을 교회에 낸다면 구제를 전적으로 교회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세금은 국가가 관리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재정을 관리하는 것이 복지와 구제 사업을 위해서도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는 일은 국가나 정부가 재정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계몽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구제활동이 일종의 율법으로 작동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제를 한 사람은 율법적으로 자만하게 될 위험이 있고, 못한 사람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극단의 휴머니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슈바이처도 테레사 수녀도 장기려 박사도 극단의 휴머니즘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탤런트 아무개는 고아를 몇 명이나 입양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나에게 찾아와 “목사님은 왜 고아를 입양 안 하십니까? 탤런트도 고아를 몇 명씩이나 입양을 하는데 목사님이 한 명도 입양을 안 하시면 됩니까?”그렇게 말하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맨해튼에 나가면 지하도에 구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비해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다.”고 누가 나를 비판한다면 역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도덕적 불안감을 갖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극단의 휴머니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휴머니즘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휴머니즘은 교양의 문제입니다. 교양은 쌓아야 합니다. 교양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양으로 구원받는 것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유다의 휴머니즘을 가로 막으신 주님은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당신의 존재와 사역에 집중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적 사역 앞에 인간의 모든 행위는 존재론적 가치를 잃고 맙니다. 유다의 휴머니즘이 아무리 고귀해도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휴머니즘의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예수님의 생애에 참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참된 신앙에 실패한 자들은 은사주의나 율법주의나 경건주의나 종교다원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롯유다의 휴머니즘에 감동하거나 설득되지 않도록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야 하고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요 1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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