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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이지만 낙관적인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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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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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나친 낙관주의를 경계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자 중에도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분의 글은 상당히 낙관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 이후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은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복음 자체가 인간과 세상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은 비정상적인 인간과 세상을 비판하고 있는데, 물론 성경의 비판이란 절대적이고 참 된 표준에 의한 비판입니다.

만약 거짓되거나 불완전한 표준에 따라 무엇을 비판한다면 그 표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나친 낙관주의를 경계한다고 한 것은 아예 모든 비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나이브한 낙관주의를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본주의의 특징이 낙관주의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 낙관주의를 인본주의적 낙관주의와 혼동하는 일은 심히 우려해야 할 일입니다. 진리의 표준이 없는 생각은 그것이 이성이나 합리성에 근거하건 경험이나 직관에 근거하건 인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비난 받는 대부분의 잘못은 나이브한 낙관론자들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지나친 비판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비판이란 기본적으로 합리적 과학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적 수준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비판은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수준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자녀를 때리는 부모의 매에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자녀에게 유익합니다. 비판도 그러한 차원의 비판이 아니면 비판하는 자신과 비판 받는 모두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고 모두에게 미움과 증오심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며 비판하면서도 사랑의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미련하고 둔해도 나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그런 능력도 언제나 발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비판이 궁극적인 낙관주의에 근거하지 않을 때 잘못된 비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오한 신학적인 원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에게 내리시는 벌 가운데 궁극적인 복음을 넣어 두셨습니다. 이것이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궁극적으로 비관적이 되면 안 됩니다. 무엇을 비판한다는 것은 더 나은 무엇이 가능하리라고 보기 때문에 하게 되는데 인본주의의 더 나은 무엇이란 결국 인간 스스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비판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에 근거한 것이기에 믿기에 족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이해에는 노아 홍수 사건이 큰 도움이 됩니다.

노아 홍수 사건은 인류가 당한 재난 가운데 가장 엄청난 규모의 재난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을 비롯하여 거의 세계 모든 지역의 여러 문헌에도 엄청난 규모의 홍수 설화가 있습니다. 그런 홍수설화나 대 규모 홍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다 노아 홍수를 이야기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노아 홍수는 인류가 경험한 전무후무한 자연재해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재난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사건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심판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소홀히 취급할 위험이 있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에서 심판보다 더 강조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문제의 크기만큼 문명도 발전합니다. 작은 규모의 실패나 작은 규모의 재난은 작은 발전을 가져오고 큰 실패나 재난은 큰 발전의 동기가 됩니다. 노아홍수는 그러한 재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규모의 프로젝트인 바벨탑을 쌓게 하였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함께 바벨탑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7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입니다. 바벨탑이나 피라미드는 문제에 대처하는 인간의 정신의 전형적인 상징입니다. 바벨탑이 인류 문명사적 측면에서 보면 괄목할 만 한 업적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신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사상사와 비교하면 계몽주의가 인류 문명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할지라도, 계몽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사상은 반기독교적인 것처럼 바벨탑의 가장 핵심적인 정신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를 심판으로 이야기 할 때, 그 심판은 인간의 죄가 불러온 결과입니다. 심판의 결과에 대한 인간의 대안은 바벨탑이고 하나님의 대안은 언약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담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하나님의 언약은 심판의 사건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사건을 통해서 그 언약이 구체화 됩니다. 인간의 문제에 대한 인간의 대안은 바벨탑이고 하나님의 대안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조에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대안은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흩어짐을 면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의 대안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에서 생명멸절에 대한 설명은 예상 외로 간략(창 7:21-23)하고, 나머지 일에 대한 설명은 지나칠 정도로 세세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 짐승들을 방주로 끌어들이는 일, 그리고 홍수가 물러가는 장면은 아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이러한 기록에서 노아홍수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에서 창세기 저자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인간의 죄가 관영한 것도 사실이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도 사실이지만 전체 이야기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구원입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강력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다면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놓칩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공부할 때 본질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주 나쁜 버릇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쓰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구약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언약입니다. 노아와의 언약은 그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모세와의 언약과 대비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맺으신 언약은 기본적으로 인격적입니다. 언약에 어떤 단서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벌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노아와의 언약에는 그런 단서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에 대해 노아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무조건적이라는 뜻입니다.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남았지만 인류멸절이라는 엄청난 재난에서 살아남은 그로서는 모든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이런 공포심은 노아에게 뿐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도 많습니다. 지구 종말이나 인류 멸망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는 많습니다. 핵전쟁, 대지진, 빙하기의 도래, 지구와 혜성과의 충돌, 슈퍼 박테리아나 변종 바이러스에 의한 인류 멸망,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인한 식량고갈, 컴퓨터와 인간과의 전쟁, 외계인의 지구 침공 등 온갖 종류의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지난해도 그 지난해에도 그해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3차 대전을 이야기 하고, 어떤 이들은 바코드가 적그리스도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꾸 들으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사이비는 그런 것을 이용해서 사람을 미혹합니다. 소설이나 영화도 이런 것을 주제로 다룬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가 아무리 그런 이야기들로 뒤숭숭하다고 해도 노아 홍수 직후의 상황처럼 두렵고 황망하고 절망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아는 다시 아침이 올까, 다시 밤이 올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올까 두려웠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모든 자연 질서가 뒤틀어지고 엉망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대재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사람에 대한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점이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 약속은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창조의 은총과 창조 보존의 은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기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모든 구원의 기초로 봅니다. 사도신경의 첫머리도 역시 권능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창조의 권능에서만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은총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성까지 넘어섭니다. 이에 근거해서 창세기 기자는 자연의 대재앙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성경의 약속을 믿느냐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뿐 아니라 아무것도 안 믿는다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이 없으면 우리는 불안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이 뒤숭숭하고 불안한 세상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소망가운데 살아갑니다. 노아 홍수는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이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의 약속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은 우리를 비관주의자가 되게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절망보다 크신 사랑의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절망적 상황과 세력에게 굴복하지 않고 소망가운데서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비관적 현실에서도 궁극적 낙관론자로 살게 하십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 사 54:8-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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