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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예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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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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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오심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실재 생일이 아닌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도 기독론적 의미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전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는가에 많은 관심을 쏟아왔습니다. 전자는 성육신과 양성론(two natures of Christ)에 대한 관심이었고 후자는 속죄론 또는 구원론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주후 325년 니케야회의와 주후 541년 칼케돈회의를 거치면서 정통 교리로 발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요 참신이시며, 이 두 본성의 관계는 ‘혼합됨이 없으시며 변화됨이 없으시며 분리됨이 없으시며 분할됨이 없으시다’는 양성론 교리에 도달하였고 오늘날까지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성론과는 달리 구원론은 크게 쟁점화 되어, 대속의 그리스도를 통한 개인구원과 해방자 그리스도를 통한 사회구원을 넘어 우주적 그리스도를 통한 생태적인 구원이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였습니다.

보수적 교회는 개인의 회심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복음화’에 관심을 기우렸고, 자유주의 교회는 사회 구조악을 일소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인간화’에 관심을 기우려왔습니다. 또한 보수적 교회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를 잘 돌보고 관리하여 ‘창조의 보전’과 생태학적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물론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창조의 보전과 생태계 회복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교회가 사회구원과 생태학적 구원을 강조하여 정치 경제 사회 자연환경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칼 마르크스적 이상과 융합시켜 불신자들의 관심과 조우하는 동안 보수교회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물리적 힘만을 키워왔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와 우주와의 관계를 천명하였습니다. 우주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골로새서의 찬양과 관련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그의 존재 외에 우주 안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3의 실존방식’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였지만 논의를 더 이상 전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본회퍼는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현존의 방식과 현존의 장소를 삼중적으로 설명하여, 그리스도의 삼중적 현존의 방식은 말씀, 성례,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삼중적 현존의 장소는 인간의 중심, 역사의 중심, 자연의 중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치신학을 통해 구원의 정치적 세계사적 지평을 강조해 온 몰트만은 구원의 지평을 다시 확대하여 우주적 차원을 포함시켜 생태학적 관점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삼중적 실존 방식’을 지닌 자로서 역사적 실존(인간)이며, 교회공동체로 실존(하나님의 아들)하며, 그리고 우주적 실존(만유)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을 지녔다는 전통적인 양성론(兩性論)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신성 및 인성과 더불어 우주성이라는 제3의 본성을 지녔다는 뜻에서 그리스도의 삼성론(三性論)을 명시적으로 주장한 이는 떼이야르 드 사르뎅입니다. 정통교회가 기독론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동안 그는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실존주의적으로 설명하여 급기야는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의 몸의 우주적 편재라고 하여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이론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우주관은, 현재 우주가 무익함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일시적이고 언젠가 회복될 때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재창조될 우주의 주요한 두 요소는 첫째,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그들과 자신과 정당한 관계를 맺도록 하실 것이며(겔 37:26-27, 렘 31:31-34)), 둘째, 하나님의 전 피조계가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11:6-9; 35:1-2, 9-10). 그들은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우주관은 애굽인과 메포타미아인과 가나안인들의 순환적 우주관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히브리인들은 우주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희랍인들은 우주를 사변적인 이성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우주내에서 이성을 통하여 발견한 원칙들에 의해 우주관이 좌우되었지만 성경의 우주관은 구약과 신약에서 뚜렷한 연속성을 보이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확연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또 유지하고 계시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은 우주의 숨은 구조를 조사하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창조 질서 속에서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이해하는데 모든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여 피조물이 창조주와 영원 전부터 공존했을지도 모른다거나 창조주와 피조물이 일체(一體)라는 그 어떤 암시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창조의 질서도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주와 전피조계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인간 중심적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을 포함하여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 질서 있는 우주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 인간과 우주의 질서를 세우는 일에 돕는 존재이고 사탄은 그 질서를 파괴하고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세대의 인간과 자연과 문명은 예수 그리스도 없는 무질서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새 대통령이 다스리는 나라에도, 새로운 목회자가 부임한 교회에도, 장밋빛 정책과, 불같은 진정성 있는 열심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질서가 없다면 혼돈과 무질서와 두려움과 고통이 심화될 뿐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을 위하는 이론과 사상과 철학과 정책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보편가치도 인위적인 질서도, 정치 개혁이나 경제정의도, 생명공학이나 복지정책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도 인간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질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인간에게 복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금번 성탄절에는 모든 이들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의 조국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미국에 예수님이 창조하시는 우주적 질서를 통하여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 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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