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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예수님의 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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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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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상 법정에 고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3:2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가 유대인들을 미혹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고, 셋째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볼 때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한 내용 중에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유대인 내부의 문제이고, 둘째는 빌라도가 볼 때 세금 내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예수를 고발하는 유대인 자신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굳이 그 죄목으로 예수를 고발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모함일 가능성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문제에만 주로 사실 심리를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저항할 인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발자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란 말이냐?”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빌라도는“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으로 모든 심문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총독인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는 로마 체제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시지 않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로마 체제를 거스른다고 고발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민중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예수를 내주었지만 그런 정치적 부담만 없었다면 석방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실질적으로 유대인의 왕을 자처했다면 당연히 로마법의 처벌 대상이 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로 본 것입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모든 유대인들에게 버림당한 예수가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발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습니다. 아무도 예수를 변호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마저 떠나버렸습니다. 지지하는 이 아무도 없이 혼자 왕이 된다는 것은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일입니다. 빌라도는 그런 처지에 있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Συ είσαι ο βασιλεύς των Ιουδαίων)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이 질문은 단순한 사실 심문의 차원을 넘어 심오한 신학적 질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처지나 그의 출신성분으로 보아 그를 왕으로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지난 2천년동안 주변으로부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증거, 곧 인류 구원자라는 증거를 대라고 요구받았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일종의 거부감, 조롱, 또는 연민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고소한 자들이 부당하지만 그들과 싸우지 않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로마 정부에 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대응방식은 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제에 대응하는 형식과 동기와 목적이 이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예수님이 한창 잘 나갈 때 민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도 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시도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개혁해서 깨끗하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절대적인 생명의 나라이고 복지국가를 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복지 국가가 이 세상에서는 최선의 나라입니다.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교육, 직업, 의료, 노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지 국가가 기독교의 궁극적인 미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도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복지 국가를 건설해도 인간은 여전히 죄를 짓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이 최초에 죄를 범했을 때 그 환경이 낙원이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복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은 이상일 뿐입니다.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을 들어보면 금방 유토피아가 실현 될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그런 복지 사회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의 나라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합니다. 교회가 부패하여 정의롭지 못하고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비판되고 개혁되어야 하지만 여느 비판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사회 건설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이런 오해는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정치가 세상에 참된 평화를 제공할 수 없듯이 유대교의 율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일찍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면서 이 세상 나라와 그에 비교되는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다니엘 2장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왕의 꿈에 큰 신상이 나타났습니다.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운 이 신상은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습니다. 이 환상은 바벨론과 그 뒤를 이어 일어날 제국들을 가리키며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아니한 돌이 날아와 그 신상을 부셔 뜨려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날려버리고 신상을 쳐서 부셔 트린 돌은 태산을 이루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장래에 될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30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시간 거리인 시베리아에 원자탄의 1,000배의 위력의 큰 운석이 떨어졌습니다. 그곳에 떨어진 운석이 뉴욕 맨허턴 약 13마일 상공에서 폭발하였을 때를 상상하여 제작한 필름을 보았습니다. 반경 50마일 안의 커넷티컷트와 뉴져지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인공적인 도시건물들이 먼지와 수증기로 증발해버렸습니다. 과학자들은 언젠가 지구는 운석이나 혜성 같은 것과의 충돌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경제정의, 정치개혁, 대선결과, 환경문제와 자원문제들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적 전통과 정치적 권위도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운석이 떨어지거나 지구가 혜성과 충돌하여 겨와 같이 부셔지고 날아갈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보여주거나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능력이며, 부활능력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의 율법이나 로마의 실정법으로도 규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렇다면 네가 왕이 아니라는 말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가 로마를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왕권과 우리가 생각하는 왕권은 다르다고, 당신들은 이전투구와 권모술수를 통해서 원하는 질서를 세우려고 하지만, 그래서 왕과 장군과 귀족들과 막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기다린다고, 그래서 로마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로마 황제의 왕권은 끊임없는 권력투쟁이지만 예수님의 왕권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로마와 공연하게 경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이 부정당할 때는 순교를 불사하고 싸웠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 체제 아래서 ‘예수가 왕이다.’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이 고유한 왕권에 대한 인식과 인정과 믿음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인식과 믿음만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이 경쟁만능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으로 자연과 인간 모두를 고통하고 신음하게 하는 우상숭배적인 시대정신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왕권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믿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종교 권력에 사로잡혔던 대제사장들도 이해하지 못했고, 로마 황제 체제에 갇혀 있던 빌라도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억지로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차원이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당장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성으로 이해되거나 해결되지도 않고 인격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모든 것에 미치는 예수님의 왕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는 자는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삶과 우주에 미치는 예수님의 고유한 왕권을 인정합니다. 그의 부활생명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라는 사실을 머리와 가슴과 영혼과 육체로 받아들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통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삽니다.

우리는 대제사장들로 대표되는 율법적인 왕권과 빌라도로 대표되는 정치적인 왕권으로부터 나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국민의 의무와 책임감의 벅찬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의 의무나 국민으로서의 의무나 가정에서의 의무에서 탈출하라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정치를 폐기처분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삶의 형식들입니다. 형식은 형식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참된 생명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충만한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기 싫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기 싫지만 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기 싫지만 그런 것들은 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하지 않으면 불행하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이 정도를 깨닫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왕권에 지배받고 통치 받는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 마당을 쓸면서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왕권의 통치를 따르고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의무와 책임감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권의 통치에 따라 그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의 지배에 따라 긍지와 보람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지만 언제나 명령만 하지 않으시고 권하시고 가르치시고 타이르시고 달래시고 기다리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의 왕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 비장한 각오가 안 선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를 듣고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순종합니다. 나의 지식과 의지와 감정과 삶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왕권이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고후 5: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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