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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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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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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그가 1980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정의(Justice)”란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라고 합니다. 영어 제목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인데, 다른 나라에서보다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정의와 관련된 각종 딜레마를 비롯하여, 공리주의, 자유주의, 칸트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공동체주의를 정의라는 개념과 연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이 미국에서는 10만부 정도 팔렸는데, 한국에서는 2012년 6월까지 130만부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철학 서적이 10만 부 이상 팔린 적이 없다고 하는데, 13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하니까 대단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도 자기의 책이 한국에서 그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에 대해 놀라워하였고, 직접 한국에 가서 강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아도 정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만큼 정의라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쉬운 문제였다면 책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나름대로 정의에 대하여 정의를 내려 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 국민들이 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철학에 대해, 그것도 정의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많은 것은 현실적으로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갑자기 정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강가에서는 목마를 이유가 없지만 사막에서는 누구나 목마르게 마련인 이치와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같은 것은 같이 취급하고,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요즘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비정규직이 기업주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참 억울한 경우가 많습니다.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규직과 똑 같은 노동을 하면서 정규직에 비해 훨씬 못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문제도 사회정의 차원에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기업과 대학교에서는 비정규직에 종사하던 사람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하였습니다. 물론 하는 일이 같다고 대학을 나온 사람과 초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같은 월급을 받는 것은 공평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무조건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을 없애는 데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지혜로운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정규직이 필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 어디서든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둑을 둘 때 양쪽 모두는 바둑 규칙에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바둑을 둡니다. 그런데 만약 바둑을 두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힘이 세다고 하여 마음대로 규칙을 어긴다면 정의롭지 못합니다. 정부나 기업이나 교회나 개인은 이 기본적인 규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힘이 있다고 하여 기본적인 규칙을 무시하면 억울한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법과 규칙과 질서는 약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법과 규칙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그 공동체 안에 있는 약한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다. 몇몇 사람이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힘 있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더욱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앞선 사람들과 힘 있는 사람들이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니까 약한 사람들까지도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면 나만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청소년들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는 설문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법을 안 지킨다고 욕만 할 것이 아니라 힘없는 국민 모두가 법을 지켜야 합니다. 강한 사람은 법을 안 지켜도 별로 손해를 안 보지만 약한 사람이 법을 안 지키면 최소한의 안정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법이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지키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정상적인 과정을 통하여 어떤 법이 제정되었다면 그 법이 내게 좀 불리해도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질서의식입니다. 투표에 의해 결정이 되었는데도 끝까지 자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독재자나 하는 짓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이 부당한가를 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억울한 일 당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하루에 평균 42명이 자살을 한다는데, 그들은 거의 억울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특히 학교 폭력으로 인해 학생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억울함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억울하지만 누구에게라도 이야기를 하면 더 심한 폭력을 당할 것이 두려워 혼자서 견디다가 결국 자살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억울한 일을 당하는 학생은 자살을 선택할 만큼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가해자들은 재미로 친구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비록 학교 폭력이 아니더라도 모든 부정의(不正義)는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고, 피해자는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가해자는 자신의 부정의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학교의 폭력이 그 사회의 부정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사회는 정의로운데 학교에서만 정의가 무시되고 폭력이 일어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나 부정의도 막아야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부정의와 폭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경계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약자를 무시하고 보호하지 않는 자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고 그런 자들이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으려면 모든 것이 정의롭게 되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은 강조하지만 정의에 대하여 무관심 한 것은 정의가 사랑의 또 다른 방법임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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