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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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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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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TV 공영방송의 앵커가 뉴스를 끝내면서 방송이 끝난 줄 알고 속에 있는 말을 뱉어버렸습니다. 그는 방송 원고로 테이블을 탁 치며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생중계로 방송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그 앵커는 아마도 상당히 곤욕을 치렀을 것입니다. 노대통령도 “더러워서 대통령 못해먹겠네!”라고 했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더러워서 못해먹겠?”라는 말은 가까운 사람과의 사석에서는 종종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종종 마을 앞 공원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 나가서 운동을 하는데 거기에 별별 직업을 가진 분들이 다 나왔습니다. 목사, 의사, 교수, 사장, 교사, 공무원, 전기공, 목수, 구멍가게 사장... 이분들이 운동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주로 비즈니스 하는 분들이 “요즘 더러워서 사업 못해먹겠다.”는 말을 자주하였습니다.

공무원들도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업하는 분들과 공무원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놀란 것은 교수들도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교수가 그런 말을 해도 안 놀라겠지만 그 때만 해도 제가 순진해서 그랬는지 “교수가 저런 말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 놀랐습니다.

가까운 사람과의 사석에서야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때와 장소와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해도 괜찮은 말이 있고 해서는 덕이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 한 마디의 말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되고 또는 부풀려지기도 하고 오해되기도 합니다.

말이란 입에서 나오기 전에 control할 수 있지 입 밖으로 나와 버리면 말한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말이 제 멋대로 종횡무진 쏘다니며 아무에게나 빌미를 주어 수습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행히 덕 있는 말이면 좋은 영향으로 확산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책잡힐 말이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를 비난하고 폄하할 빌미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말을 적게 하여 실수할 확률을 줄이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잠언기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 10:19절)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교계의 상황을 보면 거의 모든 갈등이 말싸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들이 공정하게 말하지 않고 자꾸 한쪽으로 치우쳐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들어도 고개를 끄떡이며 일리가 있다는 느낌을 주는 말을 해야지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들으면 속을 후련하게 하는 말이나 반대편 사람이 들으면 화나게 하는 말은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 공평하고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더러운 말”은 문자적으로 부패한 말이라든가 혹은 욕설이라든가 저질적인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의 있는 험담과 중상모략을 가리킵니다. 똑똑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수려한 말일지라도 그 속에 악의가 있는 말은 더러운 말이라는 뜻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말, 폄하하는 말, 비난 하는 말은 다 더러운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입의 말이 사람들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말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부모에게 하는 말, 자식에게 하는 말, 남편에게 하는 말, 아내에게 하는 말, 이웃에게 하는 말, 친구에게 하는 말, 목사에게 하는 말, 교인에게 하는 말, 세상에 대해서 하는 말, 정부에 대해서 하는 말, 지도자에 대해서 하는 말, 교회에 대해서 하는 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는 말도 들으시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자기의 입의 말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다윗처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예배나 기도나 찬송이나 헌금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처럼 구체적으로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 주께 열납되기를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입으로 한 말도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말이란 그래도 양심과 염치와 예의의 스크린을 통해 한 번 걸러서 입 밖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해도 교만한 말, 염치없는 말, 경우에 어긋나는 말, 악의에 찬 말, 거친 말, 저질적인 말들이 다 걸러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많고 잘못 한 말 때문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곤욕을 치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마음의 생각은 더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생각은 양심과 예의와 염치의 스크린에 걸러지지도 않는 것이 많으니까 더 더럽고 더 악하고 더 염치없는 것들입니다. 성경 말씀은 정확합니다. 더러운 것들은 모두 우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사람은 마음속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대로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십니다. 성경은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KJV은 “심장”을 “the reins and the heart”라고 하였습니다. reins는 신장인데 감정을 가리키고 heart는 심장으로 마음을 가리킵니다. 신장과 심장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기능을 늘 살피시고 시험해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는 말만 조심해서 되는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말만 조심해서 된다면 선천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은 실수도 많이 하지 않을 테니까 말 많은 사람보다 안전할 것이고 심지어 말 못하는 벙어리는 완전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서기관들의 악한 생각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행동보다는 말로 죄를 짓기가 쉽고, 말보다는 생각으로 죄를 짓기가 쉽습니다.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추하고 더러운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드러나는 행동과 말은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과 말을 다스리기 전에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우리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괴로워했습니다(롬 7:15-24절).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 들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절).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더러워 00못해먹겠다 하지만 세상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더럽게 만드는 오염원입니다.

우리 마음 이대로는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못되고 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우리 스스로 고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입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이 발전하여 사람들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교만은 1,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무참히도 깨어졌습니다. 그 때 독일에서 어떤 사람이 그린 그림이 있는데,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리려고 하는 그림입니다. 자연과학의 교만을 풍자한 그림입니다. 인간의 교만과 무지와 무능을 풍자한 그림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의 생각까지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이 더러운 마음을 어떻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러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7,58절).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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