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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사적인 악, 공적인 이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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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8-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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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 년 봄 의사인 버나드 맨드빌(Bernard de Mandeville)이 쓴「벌들의 우화, 또는 사적인 악, 공적인 이익 The Fable of the Bees, or Private Vices, Public Benefi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이 책은 이전의 사람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실한 노동이 부를 창출한다는 생각은 건전한 경제학 이론을 뒷받침 해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성실한 노동자의 가치를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맨드빌은 수백 년 동안 전해오던 그러한 생각과는 다른 주장을 하였습니다.

즉 그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은 부자라는 주장(부자들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다)을 하였습니다. 그의 책의 부제 ‘사적인 악, 공적 이익’이 말해 주듯이 부자의 탐욕과 악착스러움이 결국은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맨드빌의 주장이 부자가 빈자보다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부를 추구하여 그것을 얻는 일은 열심히 일을 해도 사회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일보다 사회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부자들의 전형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맨드빌의 주장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18세기와 그 이후 거의 모든 위대한 경제학자와 정치 사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1752년 흄은 그의 「사치론」에서 부의 추구와 불필요한 물자에 대한 지출을 옹호하는 맨드빌의 주장을 정당하다고 하였고, 24년뒤인 1776년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부자들의 이익을 옹호하였습니다. 스미스는 많은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부자가 많다는 것에 매우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의 경제 이론에서 부자는 한정된 재물인 나라의 부에서 너무 많은 몫을 챙겨간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한정된 것이 아니라 기업가와 상인의 노력과 야심을 통하여 늘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인 악덕은 시장의 작용을 통해 미덕으로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 자신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부자들은 쾌재(快哉)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중세기나 근대 이전까지 전통 경제이론에서 악당 취급을 받아오다가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영웅으로 새롭게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주장으로 부자들은 사회의 모든 사람을 돕는다는 명예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부자들은 국가와 사회의 번영을 주도해 나가는 반면, 가난한 자들은 기능적인 역할만 담당하고 복지와 자선에 의존한다는 점 때문에 국가와 사회적 자원을 고갈시킨다는 비난까지 감수해야만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부당성과 모순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반발한 것이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1755년에 발표한 「 인간불평등기원론 」, 칼 마르크스(karl Max)가 1862년에 발표한 「 자본론 」, 엥겔스(F.Engels)가 1845년에 발표한 「 영국노동자 계급의 조건 」등입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와 복지사회의 실험을 거처 발전한 것인데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오랜 임상실험을 통하여 터득한 교훈을 무시하고 무모한 경제적 외도와 탈선으로 전 세계를 경제공황상태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지 난 2천년의 서양문명은 부와 지식과 신체적 안전과 수명연장과 경제적 기회와 여가의 엄청난 발전과 고급화를 이룩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발전은 사람들의 불안의 수준도 높여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직위와 성취와 수입 때문에 걱정이 그칠날이 없습니다. 절대빈곤과 실제적 궁핍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점점 더 늘어나고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나 명예나 행복이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인 행복은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나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느낌이 불행이고, 그들보다 낫다는 느낌이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수준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합니다. 나와 비교가 안될 만큼 지위가 월등히 높거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과는 비교 하지도 않지만 비교 한다고 해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먼 것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가장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와 가까운 친구들, 동일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성공입니다.

우리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나고 그만큼 불안의 이유도 늘어납니다. 19세기의 많은 정치와 경제 개혁가들이 원했던 것은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엘리트와 가난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사는 불평등한 세상이었습니다. 따라서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법에서는 능력주의의 원리가 승리를 거두었고 정치 혁명과 소비자 혁명을 통해 사람들의 기대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심리적 고뇌를 더욱 깊게 하였습니다.

현대인에게는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고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평등과 낮은 기대수준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누구나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지금의 발전한 사회는 과거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고 꿈을 꾸게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나의 모습과 더 노력했으면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의 격차를 인하여 과거보다 더 심한 궁핍감과 불안을 느낍니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지고,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농민이나 성직자나 귀족이 서로 의지하고 산다는 생각이 강했으며 가장 가난한 계급의 가치도 높게 평가되었었습니다. 농민의 삶은 성직자나 귀족들보다 힘들었지만 그들이 없으면 다른 두 계급도 결코 안정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였습니다. 부가 제공하는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부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적인 악이 공적인 이익이 된다는 그릇된 생각이 거센 사회주의의 반발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여 왔지만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틈새를 비집고 맨드빌의 「벌들의 우화」, -사적인 악, 공적 이익-을 찬양하다가 사적인 악은 필연적으로 공적인 악을 낳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의 경제, 이대로는 안 되고 반드시 개혁해야 할 텐데 어떤 이론적 대안보다 우리 모두가 그동안 무시했던 검소와 절약이라는 고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의 필요를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4,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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