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의식을 버리는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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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1-09-0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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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세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지만 모세를 통하여 주셨기 때문에 모세가 가르치고 명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때도 언제나 모세의 권위에 기대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모세의 율법”등의 표현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인정하여 특별히 대우하셨음을“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만큼 존경 받는 인물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장려할 일입니다. 존경 받는 지도자가 바른 권위를 가졌다면 더 없이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다. 바른 권위는 질서를 세워주고 질서는 자유와 평화의 진가를 누리게 합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교회에서는 목사가, 학교에서는 선생이, 나라에서는 위정자들이 사람들에게 존경 받으며 바른 권위를 행사할 때 갈등과 분쟁은 상쇄되며 살 맛 나는 복지 사회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존경 받는 지도자에게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릇되게 존경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나라와 사회에는 역사적으로 존경 받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인들에게 존경 받는 그들도 그가 생존했던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존경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존경하는 모세이지만 그가 생존했던 시대에는 그가 인도했던 백성들로부터 원망과 시기와 도전을 받았고 심지어 반역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대인들은 모세를 존경하고 그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높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존경하고 그의 권위를 높이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모세는 존경 받을 자격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그릇 되게 존경하였습니다.
존경의 대상이 진정 존경할 만한 인물일 때 그릇된 존경심을 문제 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우선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모든 이들의 진정한 유익을 위하는 거짓 없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 본을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 무조건 거부감을 가지고 대하지 않으셨고 가난하고 약한 자라고 무조건 편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그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여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죽기를 구했고 모세도 하나님께서 죽여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것이 분명 장려할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죽음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자살을 생각하면 안 되지만 빨리 하늘나라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너무 고달프고 피곤했던 어느 날 오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라는 찬송이 흘러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요나는 못된 심보로 죽고 싶다고 하였지만 모세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지쳐서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참 못되게 굴었고 그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백성들 때문에 힘들었던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 대하여 너무 화가 나셔서 그들의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온 백성들은 자기 집 문에서 울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모세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낙심과 좌절과 절망이 그를 엄습하였습니다. 원망의 이유는 너무 유치했습니다. 고기,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같은 것들을 못 먹는다고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그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진정한 이유는 정말 그런 것들을 먹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 못 먹는 것까지 모세를 원망할 이유로 삼을 지경이 되었음이 문제입니다. 아무도 모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죽여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런 요청을 문제 삼지는 않으시고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백성 중에서 지도자가 될 만한 70명을 모아 회막으로 데리고 나와 너와 함께 서면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말씀대로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함께 모인 장로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였으며 그들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습니다. 70명의 장로 중에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한 소년이 달려와 그러한 사실을 모세에게 전하자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여호수아가 참지 못하고 당장 예언을 못하도록 하라고 모세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70명의 장로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은 모세의 마음을 이해하고 모세가 지는 짐을 나누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에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화를 내자 모세는 그게 무슨 빅딜이냐는 식으로 그는 모든 백성에게 성령을 주셔서 모두 선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70인의 장로들에게 영을 임하게 하신 뜻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70명의 장로 뿐 아니라 온 백성에게 영이 임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영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모세와 함께 백성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입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모세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반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공평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 받는 것을 어떤 특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세의 명을 어기고 안 나왔으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언도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확대되고 성취되기를 기도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형식화 된 신앙이 보여주는 인본주의의 전형입니다. 물리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와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부합니다. 모세는 자기가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이 자기가 백성들보다 뛰어나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모세는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백성이 자기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이해받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것은 곧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보인 태도는 충성 같지만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사람을 위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생각한 인간적인 권위나 특권 의식이나 몇몇 사람이 자기 말 안 듣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참된 권위는 그가 인위적인 권위와 특권의식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엘닷과 메닷이 불순종한 것은 나쁘지만 그것은 모세가 참으면 그만입니다.
그들에게 영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가부를 말할 일이 아닙니다. 바른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서 출발하고, 그릇된 신학은 인간의 판단과 상황과 합리성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다른 점입니다. 모세는 지엽적인 문제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이권, 권위, 자존심, 명예 같은 것은 괘념치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형식과 위계질서와 권위가 중요했습니다. 그런 것을 무시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는 것까지 금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열심은 모세를 위한 것도, 이스라엘을 위한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자기 권위와 기득권을 잃을까 염려해서 감정에 치우쳐 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릇된 존경심과 과잉 충성의 열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 11:29
사람들이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장려할 일입니다. 존경 받는 지도자가 바른 권위를 가졌다면 더 없이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다. 바른 권위는 질서를 세워주고 질서는 자유와 평화의 진가를 누리게 합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교회에서는 목사가, 학교에서는 선생이, 나라에서는 위정자들이 사람들에게 존경 받으며 바른 권위를 행사할 때 갈등과 분쟁은 상쇄되며 살 맛 나는 복지 사회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존경 받는 지도자에게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릇되게 존경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나라와 사회에는 역사적으로 존경 받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인들에게 존경 받는 그들도 그가 생존했던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존경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존경하는 모세이지만 그가 생존했던 시대에는 그가 인도했던 백성들로부터 원망과 시기와 도전을 받았고 심지어 반역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대인들은 모세를 존경하고 그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높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존경하고 그의 권위를 높이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모세는 존경 받을 자격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그릇 되게 존경하였습니다.
존경의 대상이 진정 존경할 만한 인물일 때 그릇된 존경심을 문제 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우선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모든 이들의 진정한 유익을 위하는 거짓 없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 본을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 무조건 거부감을 가지고 대하지 않으셨고 가난하고 약한 자라고 무조건 편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그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여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죽기를 구했고 모세도 하나님께서 죽여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것이 분명 장려할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죽음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자살을 생각하면 안 되지만 빨리 하늘나라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너무 고달프고 피곤했던 어느 날 오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라는 찬송이 흘러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요나는 못된 심보로 죽고 싶다고 하였지만 모세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지쳐서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참 못되게 굴었고 그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백성들 때문에 힘들었던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 대하여 너무 화가 나셔서 그들의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온 백성들은 자기 집 문에서 울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모세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낙심과 좌절과 절망이 그를 엄습하였습니다. 원망의 이유는 너무 유치했습니다. 고기,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같은 것들을 못 먹는다고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그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진정한 이유는 정말 그런 것들을 먹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 못 먹는 것까지 모세를 원망할 이유로 삼을 지경이 되었음이 문제입니다. 아무도 모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죽여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런 요청을 문제 삼지는 않으시고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백성 중에서 지도자가 될 만한 70명을 모아 회막으로 데리고 나와 너와 함께 서면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말씀대로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함께 모인 장로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였으며 그들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습니다. 70명의 장로 중에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한 소년이 달려와 그러한 사실을 모세에게 전하자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여호수아가 참지 못하고 당장 예언을 못하도록 하라고 모세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70명의 장로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은 모세의 마음을 이해하고 모세가 지는 짐을 나누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에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화를 내자 모세는 그게 무슨 빅딜이냐는 식으로 그는 모든 백성에게 성령을 주셔서 모두 선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70인의 장로들에게 영을 임하게 하신 뜻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70명의 장로 뿐 아니라 온 백성에게 영이 임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영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모세와 함께 백성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입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모세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반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공평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 받는 것을 어떤 특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세의 명을 어기고 안 나왔으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언도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확대되고 성취되기를 기도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형식화 된 신앙이 보여주는 인본주의의 전형입니다. 물리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와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부합니다. 모세는 자기가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이 자기가 백성들보다 뛰어나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모세는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백성이 자기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이해받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것은 곧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보인 태도는 충성 같지만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사람을 위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생각한 인간적인 권위나 특권 의식이나 몇몇 사람이 자기 말 안 듣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참된 권위는 그가 인위적인 권위와 특권의식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엘닷과 메닷이 불순종한 것은 나쁘지만 그것은 모세가 참으면 그만입니다.
그들에게 영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가부를 말할 일이 아닙니다. 바른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서 출발하고, 그릇된 신학은 인간의 판단과 상황과 합리성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다른 점입니다. 모세는 지엽적인 문제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이권, 권위, 자존심, 명예 같은 것은 괘념치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형식과 위계질서와 권위가 중요했습니다. 그런 것을 무시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는 것까지 금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열심은 모세를 위한 것도, 이스라엘을 위한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자기 권위와 기득권을 잃을까 염려해서 감정에 치우쳐 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릇된 존경심과 과잉 충성의 열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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