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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름 망령되게 사용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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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1-08-14

본문

성경에 “독약을 먹지 마시오.”라는 말은 없습니다. 독약을 먹으면 안 되는데 독약을 먹지 말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은 마치 “독약을 먹지 마시오.”라는 말과 같다고 합니다. 독약을 먹으면 안 되지만 굳이 그렇게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독약을 먹으면 즉시 죽기 때문에 아무도 독약을 먹지 않습니다.

고대 중동지역 여러 나라에서는 어디서든지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는 재판할 필요 없이 즉결처형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지 말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사회에서는 감히 아무도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살 때에 바로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바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바로뿐 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이름을 모욕하거나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생각할 때 제3계명에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계명이 주어진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독약을 먹지 마시오.”와 같은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런 것이 아닌데...”라고 생각되는 말씀을 함으로써 합리성과 상식이 아닌 성경적 관점을 찾게 합니다.

제3계명이 당시의 종교나 문화적 배경을 생각할 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씀이라는 것과 함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에 대한 벌 또한 즉결처형과 같은 무서운 벌이 아니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그 당시 주변 사회보다는 비교적 덜 가혹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주변 사회의 관습과 가치관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 종교의 계율이나 그들의 가치관과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종교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화적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은 이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다름”을 독단적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다름”으로 느끼는 것을 염려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점입니다. 전도나 선교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결과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님, 다른 복음을 전하게 하는 사탄의 올무에 걸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의 뜻은 하나님을 재한하지 말라는 뜻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고대에는 언어에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즘도 믿는 이들 중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실제로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성경적이라고 믿는 이들도 언어에 마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언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는 말씀을 말에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말 자체에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좋은 말을 하면 마음이 순화되는 것은 사실이고 좋은 생각과 좋은 말이 심리적으로 선순환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언어에 결코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주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도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기에 신령한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안 부르는 것은 불신앙이고 부르는 것은 신앙이라는 단순 논리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사랑함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바로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고대에는 이름을 짓거나 부르는 것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곧 그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담이 각 생물의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은 곧 그것들을 지배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름을 짓는 것이 지배한다는 뜻일 뿐 아니라 이름을 부르는 것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르는 것이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얼마나 강했든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도 않았고 글로 쓰는 것조차 매우 조심하였습니다. 그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거나 명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했습니다. 그것이 지나쳐 위선이 되고 형식적이 되었지만 그들은 제3계명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그리하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말이 있는데,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요, 이름을 부르면 이미 온전한 이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대상을 이해하게 합니다. 우리 집 정원에 큰 향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내가 그 나무를 “향나무”라고 했을 때 그 나무는 더운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를 시인이 볼 때와 화가가 볼 때와 목재상이 볼 때와 시 행정관이 볼 때 각각 그 의미가 다릅니다. 향나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내용을 “향나무”라고 부를 때 향나무는 매우 재한적인 의미만 이해하고 전하게 됩니다. 피조물에 대한 이해도 그러한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더욱 그러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하나님의 완전함과 위대함을 다 이해하고 드러내어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부를 수는 있습니다. 제3계명은 그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하고 경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짓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제한할 수가 있습니다. 제3계명이 바로 그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3계명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늘 부르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위험은 신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죄는 바로 신자들이 짓는 죄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신자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위험이 가장 높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진실 되게 기도하고 바르게 기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듣기가 민망한 기도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 바른 기도의 본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주기도처럼 기도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사욕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서 서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유럽이 전쟁을 할 때 모두 기독교 나라들이니까 서로 자기가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탄일이 되면 잠시 전쟁을 중단하고 적과 아군이 함께 파티를 하고 놀다가 그날이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좋게 이야기 하는 목사님들도 있는데 그런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의 군인들은 허리띠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철에 날씨가 가물어 모든 농부들이 비를 기다리는데 어떤 집사님은 새벽기도에 나가서 비 오지 않기를 열심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리타작하려고 날을 받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비 오지 않는 것이 보리타작하기에는 좋지만 전체 농촌을 위해서는 나쁜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보리타작을 다음에 하더라도 비가 오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해 주고 돈 받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것은 기도할 때 온당한 방법이나 목적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경우가 다 해당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자를 죄 없다고 인정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자를 재판 없이 즉결처형 하는 당시 사회의 관습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계명은 매우 자비로운 계명입니다. 이것은 정죄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다고 아니한다고 하여 부정에 부정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예배드리고, 찬송 드렸다고 하여 그것이 다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 기도, 찬양, 헌신, 헌금, 선교, 봉사라는 이름만 붙이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신자가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좀 합당하지 못하게 기도하는 것을 비판은 하지만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을 죄 없다고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고 찬양 드리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이나 예배드리는 것이나 차양하는 것이 죄 짓는 것이라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당연히 신령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3계명은 제2계명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우상화의 위험에 대한 경고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하나님께서 역겨워 하셨습니다. 그런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런 예배는 다시 드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죄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죄 없다고 아니하리라고 하셨지만 회복의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악하고 추한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의 사울은 믿는 자를 잡아가두고 죽이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죄임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주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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