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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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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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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대한 공포가 강조되던 시대에 독일의 한 수도사가 지옥의 공포를 극복하려고 묵상을 하며 라인 강변을 걷다가 노인 한 분을 만나 대화를 하였습니다. 수도사가 지옥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묵상하고 있노라고 하자 노인은 “나는 언제나 기쁘오. 내게는 모든 날이 선(善)하고 나쁜 날은 단 하루도 없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옥으로 보내신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자 노인은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지옥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르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오. 내가 지옥에 간다해도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않으실 터이니 두려울 게 없지 않소.”

지옥의 공포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실패와 가난과 고통과 재난과 불치의 병과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같은 두려움은 사람들을 늘 걱정하며 불안하게 합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그 고통과 불안을 극복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학문과 예술과 문화와 나아가서는 모든 세속 종교까지도 결국은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의 문제 극복을 지향합니다. 사실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은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저주 가운데서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이 찾아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이론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하지만 누구나 약하기에 믿으면서도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깨달은 분 중의 한분입니다. 신앙의 영웅은 있을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그를 진실하고 용기와 인내와 겸손과 절제를 겸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화시키셔서 위대한 주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후 한 순간에 그런 덕을 갖춘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철저하게 성화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거듭나고 성령 충만을 받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겸손하게 되고, 온유하게 되고, 성실하게 되고, 충성하게 되는 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깊은 학문과 화려한 배경은 성화의 필요성을 감하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좋은 조건은 선하고 겸손하게 될 가능성보다 교만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고, 바울의 여러 조건과 배경은 그로 하여금 쉽게 겸손해지게 할 수 없었기에 그러한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 그를 겸손하게 하는 가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시를 허락하시 것은 단순히 고통스럽게 하고 불안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그는 그 가시를 인하여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였습니다. 그의 판단과 생각으로는 가시가 주의 일에 걸림돌이며 방해가 될 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도 그 가시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그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를 세 번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세 번째 기도 후에 이 응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9절의 공동번역은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번역이 맞는다면 주님은 바울의 세 번째 기도 후에만 응답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말씀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받은 은혜가 큰 줄은 알았지만 가시도 은혜인 것을 깨닫지는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한 것을 보아 사탄이 그를 멸망시키려고 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지만 사탄의 괴롭힘을 기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기도 후에 그 가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 가시가 사탄이 준 아픔인 것을 틀림없지만, 사탄은 바울을 멸망시키기 위해 준 가시를 주님은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계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짧은 생각과 판단으로는 가시는 사탄이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이것을 허용이라고 설명하지만 고백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요셉을 이집트에 판 것은 형들이지만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를 이집트에 보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입니다. 욥의 경우도, 그에게 고통과 시련을 준 것은 분명히 사탄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이용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탄의 공작에 의해 예수님은 모함과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탄의 간계를 이용하여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고통과 두려움 자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과 불행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고통과 두려움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두려움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면 생각을 달리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의 약점을 기쁜 마음으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약한 것과 가난함과 오해와 모함과 온갖 약점과 고통을 만족하게 여기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지고 멸망시키려고 온갖 아픔과 시련을 주지만 주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나에게 복이 되고 은혜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이유와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아들이 소년이 되면 담력을 키우기 위해 숲속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한다고 합니다. 소년은 밤새도록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숲속에서 담력을 키우기 위해 두려움과 공포를 참습니다. 너무 두려워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며 악몽 같은 밤을 보냅니다. 날이 밝아 올 때 소년은 나무 뒤에서 혹시 맹수가 자기를 해칠까봐 활을 겨누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담력은 강인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옵니다. 밤새도록 활을 겨누며 자기를 지키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아들은 담대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다윗은 그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이 나에게 준 가시, 실패와 가난과 서러움과 외로움과 고통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임을 깨닫는다면 우리 모두 다윗처럼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시편 23:4,6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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