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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와 전제주의를 닮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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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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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정치력과 경제력을 행사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그러한 힘을 교회의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능력이라고 믿었었던 그 힘으로 세상 나라와 경쟁하였고 안으로는 교권에 부담이 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적 권력을 탐하여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켰고 교권에 도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 엄격하였습니다.

교황과 세상 왕들은 권력이라는 고지를 탈환했다 빼앗겼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교황이 권력의 고지를 점령할 때는 그야말로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되었고 그것이 곧 능력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믿었습니다. 교회가 행사한 그 엄청난 힘에 의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정적들과 이교도들과 이단들이 죽어갔습니다. 교회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 교회는 사람들을 지배하였지만 잘 다스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인간 독재가 그렇듯이 중세교회는 겉으로는 철저하게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의 정신과 도덕과 신앙과 삶은 지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그릇된 교회의 권위를 거부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왜곡됨을 깨닫고 분연히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개혁을 교회의 지나친 지배와 간섭에 항거하여 일어난 해방운동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인간의 삶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래의 지배 형식이 너무 느슨하여 실제생활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총체적으로 지배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종교개혁은 가정생활 일체와 공적인 생활 전반에 걸쳐 엄격하고 진지한 성경적 규율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단은 엄벌하나 죄인에게는 관대한 가톨릭교회의 지배에 복종하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해 가톨릭보다 실제로 훨씬 강하게 통제하였습니다. 그동안 순응적이고 여러 면에서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던 교회의 지배를 대대적으로 사생활과 공적 생활에 파고들어 모든 삶의 영위를 매우 부담스럽고 진지하게 통제하는 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개혁가들이 비난한 것은 삶에 대한 교회적 종교적 지배가 과다하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들이 바로 청교도들입니다.

독재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백성의 안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고 질서를 지켜야 백성이 안전하다는 논리로 자유정신과 불의에 항거하는 행위는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독재자의 전제주의(專制主義)에 대한 또 다른 변은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효율을 따진다면 전제주의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시간과 비용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제도이고 가장 비효율적 제도입니다.

전제주의는 일과 업적과 제도와 결과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효율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는 사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정의와 질서와 윤리를 강조 합니다. 일과 업적과 제도와 결과를 중시하는 전제주의 아래서는 정의와 질서와 윤리는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일의 성격에 따라 특별한 경우 방법보다 목적을 중요시해야 할 때가 있고, 목적보다 방법을 중요시해야 할 때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목적이 정당하다면 방법도 정당해야 합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전제주의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많을 때 민주시민은 마땅히 의심해 보아야 하고 경계해야 하고 힘을 모아 시정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그것을 시정하고 개혁하고 치료할 자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전제주의의 약점은 그 제도 자체가 문제를 시정하고 개혁하고 치료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혁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입니다.

종교개혁이 시작 된지 거의 500여 년이 지난 지금 중세교회와 전제주의를 닮은 현대교회들이 많습니다. 중세교회가 세속 권력과 재물을 탐한 것처럼 현대교회도 권력과 재물을 탐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증상들이 현저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을 방문했을 때, 교황은 대학자 아퀴나스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아니면 교회가 넉넉한 재물을 갖게 된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였는지 “이제 교회는 금과 은이 풍성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는“그러면 이제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은 할 수 없게 되었군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현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돈으로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선교사들이 말은 기도해 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돈을 주는 것이 곧 선교의 업적으로 평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중세 교회가 그랬듯이 현대 교회들도 이단에 대해서는 엄중하면서도 죄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에 대해 하이퍼 하게 대처하는 지도자나 교회가 이상하게도 죄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이 중세교회를 닮았습니다.

죄에 대해 관대한 것은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라 교회와 교회 지도자 모두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권위를 잃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단이나 세속에 대한 하이퍼 한 태도로 영적 권위를 세우려 합니다. 이단에 대한 가장 바른 대응은 성경을 바로 알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단을 척결하겠다는 이들이 성경 텍스트로 들어갈 능력이 없다면 그 자신이 이단을 대항할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 하기는 너무 두렵지만 성경에 무지한 사역자가 많습니다. 이 또한 중세 교회를 닮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야 하거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경우에는 수단보다 목적이 우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목적과 수단이 다 같이 중요하게 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일과 업적을 중시하는 전제주의에서는 모든 경우에 목적이 수단에 우선합니다.

현대 교회 중에 전제주의를 닮은 교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방법과 과정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재정 운영이 투명해야 하고 인사가 공정해야 합니다. 지난 2011년에 죽거나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가족과 친척과 아부하는 자들이 권력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교회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 목적을 수단보다 우선시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경우에 목적과 수단을 동일하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판단 할 수 있는 교훈과 가르침을 수도 없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교회에서 전제주의 아래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나타나면 무엇이 지나쳤는지, 무엇을 소홀히 하고 있는지 살펴서 진리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여 아픔과 희생을 감수하고 고치고 시정하고 개혁해야 하고 혁명(?)을 불가피하게 하면 안 됩니다. 전제주의는 문제의 해결책이 혁명밖에 없기 때문에 지도자가 바뀔 때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교회의 지도자가 바뀔 때도 전제주의 지도자가 바뀔 때처럼 큰 희생을 치르는 현상은 심히 우려되는 일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 빌 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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