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는 청지기가 있을 뿐 공로 직은 폐지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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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2-01-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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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은 세계의 많은 독재자들이 죽거나 수난을 당한 해입니다. 북 아프리카의 튀니지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이 지난 1987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23년간 장기집권을 해왔는데 이른바 재스민 혁명(민주화 운동)으로 권좌에서 축출되어 사우디아라비아로 야간도주하였습니다. 튀니지에서 촉발된 재스민 혁명은 이웃 이집트로 옮겨가 현대판 파라오로 군림해 오던 30년 철권 통치자 무바라크 대통령을 끌어내려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33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즐겨왔던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도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연임제를 폐지하고 종신집권을 꿈꾸다가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에는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독재자들 중에서도 최악의 종말을 맞이한 독재자는 리비아의 카다피입니다. 그는 1969년 27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42년간 아랍권의 최장수 장기집권 통치자로 군림하여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이라 부르며 기이한 행동과 세계를 비웃다가 결국 총탄에 맞아 비참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리아도 봉기하는 시민을 유혈 진압하는 아사드 대통령이 언제 축출될지 모릅니다.
거의 모든 독재자들이 비참하게 축출되거나 죽었는데, 북한의 김정일은 죽기는 하였지만 삼대에 걸쳐 독재 세습이 무리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많은 독재자들이 비운의 종말을 맞이한 2011년에도 북한의 독재가 순항을 하는 것은 강대국들의 이해타산 의 뒷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독재자가 그렇지만 북한의 독재자는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몹쓸 짓을 많이 하면서도 신처럼 존경(?)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의 죽음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태도는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가 지도자 김정일의 죽음에 대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할 말을 잊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이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직폭력 집단 안에서도 그 나름대로 조직원들에게 존경 받는 보스나 또는 선배가 있게 마련이고, 떼강도 사이에서도 그들 나름대로 좀 더 양심적인 강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극단적인 경우지만 세상에는 정말 존경 받아서는 안 될 자들이 존경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계나 교회 안에서도 존경 받아서는 안 될 지도자가 존경 받는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야 덕스러운 일이지만 존경해서는 안 될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집단과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일입니다. 부목사들을 쥐 잡듯 하는 대형교회 목사가 드러나는 업적(?)만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사려 없이 지도자를 존경하는 이들 모두의 책임입니다. 존경하는 일에 책임을 따지는 것이 긁어 부스럼 만드는 좋지 않은 일 같지만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런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존경과 칭찬은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동료와 많은 선후배들이 그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저급하다는 것을 다 아는데 그가 마치 독립투사나 개혁자처럼 정의와 개혁을 주장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많은 독자들은 그의 주장만 보고 그를 존경한다고 합니다. 존경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을 존경할 때는 여러 각도와 측면에서 그리고 신뢰할만한 다수가 오랜 시간을 두고 검증한 후에 존경해야 합니다. 권모와 술수를 일삼고 약자에게는 무자비하고 비열하며 돈 있고 권력 있는 자에게는 성인처럼 행세하는 사람을 존경하면 안 됩니다.
그런 줄 모르고 존경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만하고 야비하고 무자비한 지도자에게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고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집단과 사회의 갈등을 만드는 아주 나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다음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현실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존경이 강요될 수도 있고, 그 주위에 아부하는 무리들이 진을 치기 때문에 못된 점은 묻히고 가려질 수가 있어서 공정한 평가를 하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의외로 양의 탈을 쓴 이리 같은 이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안에도 돈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고, 세상 사람들 수준의 가치관으로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 자신도 그럴 때가 많고 그런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무지해서 대세를 따르고 전통을 따를 때가 있습니다. 아닌데 싶지만 귀찮고 게을러서 못 본체 하고 못 들은 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개혁주의를 귀하게 여기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의가 개혁되지 못하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을 좇아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토마스 쿤이 하버드에서 비자연계 학생을 위한 자연과학 개론 강의를 준비하면서 뉴튼 역학의 뿌리를 찾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읽고 어떤 주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깊은 인상과 함께 과학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후에“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개혁주의를 귀하게 여기는 이들도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글에서 어떤 주제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발전한 개혁주의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 비추어 바른 가르침과 교훈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되 잘못된 것은 어거스틴의 주장이나 칼빈의 주장이나 교단의 헌법이라도 개혁해야 합니다.
내가 소속된 교단 헌법 제4조 “목사의 칭호” 5항에 ‘공로목사’에는 “목사가 25년 이상 목사로 시무하고 현저한 공적이 있는 자가 연로하여 시무할 수 없을 때에 노회는 그 공로를 기념하여 노회원 투표 3분의 2 이상의 가결로 공로 목사가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과 개혁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폐지되어야만 하는 조항입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 헌법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늘 개혁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는 직명 앞에 공로나 명예 자를 붙여 공로 장로, 명예 장로, 공로 권사, 명예 권사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상 성경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운 것들입니다. 한 나라의 법에도 위헌 요소가 있는 시행 세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법원의 심의를 거쳐 어떤 세칙이 위헌 요소가 현저할 경우 폐지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나 교리에도 비성경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고, 교단 헌법 안에도 비성경적인 규정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그런 것들은 수정 내지는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교회 안에는 모든 직이 청지기 직이고 명예나 공로 직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연초가 되면 교회마다 제직 세미나나 혹은 청지기 세미나를 엽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이 청지기요 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새롭게 각인시키고 그 직분을 받을 때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직 세미나 같은 것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신실하고 충성된 일군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지만 그것이 교회 안에 명예직이나 공로 직을 허용하는 근거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교인들의 존경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도들은 교우들에게 서로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의 지나친 존경을 단호히 거절했고 다른 사도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교회 안의 직분 자들과 더 넓게는 모든 신자들이 청지기 들이고 종들인데 잘 섬기고 공적이 있다고 하여 명예직이나 공로 직을 수여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허용을 좇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진리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가는 이들입니다. 모든 직분 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님께서 아무도 다른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9-10-
33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즐겨왔던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도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연임제를 폐지하고 종신집권을 꿈꾸다가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에는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독재자들 중에서도 최악의 종말을 맞이한 독재자는 리비아의 카다피입니다. 그는 1969년 27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42년간 아랍권의 최장수 장기집권 통치자로 군림하여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이라 부르며 기이한 행동과 세계를 비웃다가 결국 총탄에 맞아 비참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리아도 봉기하는 시민을 유혈 진압하는 아사드 대통령이 언제 축출될지 모릅니다.
거의 모든 독재자들이 비참하게 축출되거나 죽었는데, 북한의 김정일은 죽기는 하였지만 삼대에 걸쳐 독재 세습이 무리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많은 독재자들이 비운의 종말을 맞이한 2011년에도 북한의 독재가 순항을 하는 것은 강대국들의 이해타산 의 뒷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독재자가 그렇지만 북한의 독재자는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몹쓸 짓을 많이 하면서도 신처럼 존경(?)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의 죽음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태도는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가 지도자 김정일의 죽음에 대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할 말을 잊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이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직폭력 집단 안에서도 그 나름대로 조직원들에게 존경 받는 보스나 또는 선배가 있게 마련이고, 떼강도 사이에서도 그들 나름대로 좀 더 양심적인 강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극단적인 경우지만 세상에는 정말 존경 받아서는 안 될 자들이 존경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계나 교회 안에서도 존경 받아서는 안 될 지도자가 존경 받는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야 덕스러운 일이지만 존경해서는 안 될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집단과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일입니다. 부목사들을 쥐 잡듯 하는 대형교회 목사가 드러나는 업적(?)만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사려 없이 지도자를 존경하는 이들 모두의 책임입니다. 존경하는 일에 책임을 따지는 것이 긁어 부스럼 만드는 좋지 않은 일 같지만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런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존경과 칭찬은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동료와 많은 선후배들이 그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저급하다는 것을 다 아는데 그가 마치 독립투사나 개혁자처럼 정의와 개혁을 주장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많은 독자들은 그의 주장만 보고 그를 존경한다고 합니다. 존경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을 존경할 때는 여러 각도와 측면에서 그리고 신뢰할만한 다수가 오랜 시간을 두고 검증한 후에 존경해야 합니다. 권모와 술수를 일삼고 약자에게는 무자비하고 비열하며 돈 있고 권력 있는 자에게는 성인처럼 행세하는 사람을 존경하면 안 됩니다.
그런 줄 모르고 존경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만하고 야비하고 무자비한 지도자에게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고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집단과 사회의 갈등을 만드는 아주 나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다음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현실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존경이 강요될 수도 있고, 그 주위에 아부하는 무리들이 진을 치기 때문에 못된 점은 묻히고 가려질 수가 있어서 공정한 평가를 하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의외로 양의 탈을 쓴 이리 같은 이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안에도 돈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고, 세상 사람들 수준의 가치관으로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 자신도 그럴 때가 많고 그런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무지해서 대세를 따르고 전통을 따를 때가 있습니다. 아닌데 싶지만 귀찮고 게을러서 못 본체 하고 못 들은 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개혁주의를 귀하게 여기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의가 개혁되지 못하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을 좇아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토마스 쿤이 하버드에서 비자연계 학생을 위한 자연과학 개론 강의를 준비하면서 뉴튼 역학의 뿌리를 찾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읽고 어떤 주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깊은 인상과 함께 과학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후에“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개혁주의를 귀하게 여기는 이들도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글에서 어떤 주제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발전한 개혁주의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 비추어 바른 가르침과 교훈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되 잘못된 것은 어거스틴의 주장이나 칼빈의 주장이나 교단의 헌법이라도 개혁해야 합니다.
내가 소속된 교단 헌법 제4조 “목사의 칭호” 5항에 ‘공로목사’에는 “목사가 25년 이상 목사로 시무하고 현저한 공적이 있는 자가 연로하여 시무할 수 없을 때에 노회는 그 공로를 기념하여 노회원 투표 3분의 2 이상의 가결로 공로 목사가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과 개혁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폐지되어야만 하는 조항입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 헌법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늘 개혁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는 직명 앞에 공로나 명예 자를 붙여 공로 장로, 명예 장로, 공로 권사, 명예 권사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상 성경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운 것들입니다. 한 나라의 법에도 위헌 요소가 있는 시행 세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법원의 심의를 거쳐 어떤 세칙이 위헌 요소가 현저할 경우 폐지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나 교리에도 비성경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고, 교단 헌법 안에도 비성경적인 규정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그런 것들은 수정 내지는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교회 안에는 모든 직이 청지기 직이고 명예나 공로 직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연초가 되면 교회마다 제직 세미나나 혹은 청지기 세미나를 엽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이 청지기요 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새롭게 각인시키고 그 직분을 받을 때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직 세미나 같은 것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신실하고 충성된 일군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지만 그것이 교회 안에 명예직이나 공로 직을 허용하는 근거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교인들의 존경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도들은 교우들에게 서로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의 지나친 존경을 단호히 거절했고 다른 사도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교회 안의 직분 자들과 더 넓게는 모든 신자들이 청지기 들이고 종들인데 잘 섬기고 공적이 있다고 하여 명예직이나 공로 직을 수여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허용을 좇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진리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가는 이들입니다. 모든 직분 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님께서 아무도 다른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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