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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식으로 가나안을 사는 암매(暗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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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1-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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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가 동생 민수에게 물었습니다. “민수야, 너 지금 뭐하고 있니?” 민수가 대답합니다. “응, 나 철수에게 편지 쓰고 있어” “뭐? 너 글 쓸 줄 모르잖아?” “괜찮아, 철수는 글 읽을 줄 모르니까” 영이가 볼 때 동생과 그 친구가 엉터리이지만 민수와 철수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문제가 없다기보다는 문제를 문제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중세에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사제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르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제가 아무리 엉터리로 성경을 가르쳐도 그것이 엉터리임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 가관(可觀)인 것은 엉터리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제들조차도 자기가 엉터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형편은 중세의 기독교를 형식적이고 권위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비주의가 되게도 하였습니다.

기독교만큼 가르치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많은 것을 가르치거나 또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종교의 계율에 따라 경건한 마음으로 제의(祭儀)에 참여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덕을 쌓고 자선을 베풀면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가르치는 것을 매우 강조하여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인격이 성장해 갈 것을 요구합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바울도 가르치기를 힘썼고 강조하였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광야 세대들에게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고 하였는데, “설명하다”의 히브리어 바아르 באר는 “깊이 파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뿌리를 캐기 위해 땅을 깊이 판다는 뜻으로 율법의 본래의 깊은 뜻을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선포하다”(to decare)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정황과 문맥으로 보아 “설명하다”의 번역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선포하거나 전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지키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배워서 깨달아 지키는 것을 강조한 이유는 그들이 들어가 살 가나안에는 율법에 반하는 종교와 문화와 가치관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배우고 깨달아 지키지 않으면 가나안 종교와 문화에 동화될 위험이 높은데 그것은 곧 엉터리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출애굽 2세대에게 설명하는 상황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심각하고 진지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40년 동안 인도해 온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죽기 직전입니다. 모세에게는 아쉽고 안타까운 상황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좀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당장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모든 것이 염려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는 비장한 심정으로 율법을 강론합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 옳지 못한 선입견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신약에 의하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은 정죄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면에서는 그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주신 본래의 목적은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들어갈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복된 삶을 살도록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인간은 이미 저주 아래 놓였는데 율법을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율법은 지키면 생명과 복을 준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은 놀고 즐기기 위해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지만 그곳은 안전과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서 직면하게 될 일은 원주민을 몰아내야 하는 살벌하고 두렵고 피하고 싶은 전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황에 대한 너무나 적절한 본보기입니다.

광야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40년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양식을 얻기 위해 농사나 목축도 하지 않았고,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지도 않았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위해 배를 만들지도 않았고,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건설하지도 않았습니다. 옷을 위해 길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도 싸움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르비듬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으로 피 흘리는 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그 전쟁도 이스라엘이 싸워서 이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싸운 전쟁임을 전쟁하는 내내 모세가 손을 들고 있음으로 이기게 되었던 상징을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있었던 이 모든 일들이 의미하고 가르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된다면 그 복잡한 율법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일러주실 것이고 공급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나안은 광야와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가나안에서는 땀 흘려 농사와 목축을 해야 하고, 우물을 파야하고, 전쟁을 해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것도 통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가나안은 광야가 아닙니다. 이것은 가나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는 창조에서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광야 세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었기에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그분이 하신 일을 가르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초자연적인 방법이었고 그 방법은 광야라는 기간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 본격적인 성화의 삶이 시작되는 것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초자연적인 역사가 계속된다면 신자의 성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 자녀의 공부를 대신해 주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성화를 위해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광야가 있고 가나안이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 어디까지가 광야이고 어디서부터가 가나안인지 시기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오늘의 신자들 중에는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온 지 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광야의식으로 사는 영적으로 암매(暗昧, 못나고 어리석어 생각이 어두움)한 이들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광야의식으로 만나를 기다리고 메추라기를 기다리고 바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는 일이나 만나가 내리는 일은 없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도 없었습니다. 만나를 얻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고 고기를 얻으려면 목축을 해야 했습니다. 성을 정복하기위해 피를 흘려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한국 신자들은 광야의식으로 가나안에서 살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여리고 작전”, “홍해 작전”의 특별기도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기대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믿음이 없고 영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 암매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주의해야 할 것은 땀 흘려 농사지어 얻은 곡식도 만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어 감사하는 것이고, 피 흘리며 싸워서 승리를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라고 인정하고 믿어 감사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감격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믿음이 아니고 내가 피땀 흘려 이룬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믿음입니다. 사람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 대규묘의 토목공사를 통해 죠지 와싱톤 부릿지를 만들어 놓고 그 위를 자동차를 타고 건너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허드슨 강을 건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하는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감격하고 감사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 신 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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