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사랑의 또 다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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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2-06-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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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은 유명한 사람들의 유명세에 매우 민감합니다. 인기 가수, 탤런트, 스타플레이어들의 사인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른들이나 기성세대들이 볼 때에는 참 유치합니다. 그런데 어른들도 인기에 영합하고 권력에 아부하고 재물에 눈이 멀어 유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기 연예인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건강한 청소년들이라도 그 시기에 한 번씩 치르는 홍역 같은 것이지만 어른들이 자기의 욕심에 끌려서 인기와 권력과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경계해야합니다. 사람이 인기를 얻게 되거나 권력이나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게 되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돈이나 권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합니다. 사실 없는 사람이 재물이나 권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해서 덕을 볼 확률은 희박하고 그들의 오만과 횡포로 인해 상처받을 확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힘 있고 유명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를 하나님께로 향하면 실망하거나 낙심하게 될 일이 없고 참으로 귀한 복이 됩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때로 두려운 분이시며 또한 한 없이 너그럽고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인격 안에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도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룰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러리라고 무의식 가운데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서울 정도로 공의로우신 분이시지만 또한 한없이 너그러우신 분이신데 그 이유는 무서운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의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을 어느 정도 배우고 알게 됩니다. 부모는 때때로 자식에게 대단히 엄격합니다. 엄격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잘못을 무섭게 꾸중하고 나무랍니다. 무섭게 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맞으면서도 부모의 품으로 파고듭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뢰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사랑의 축척된 경험입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돌봄의 손길과 아버지의 깊은 배려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배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조건 없는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속성을 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깊은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의 또 다른 손길임을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깊은 경험적 앎을 통해 하나님께 반해버렸습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이 대화의 주제가 됩니다. 그 하나님을 좋아하고, 너무 좋아서 그 하나님을 노래하고, 자랑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고 온통 그의 삶은 하나님으로 꽉 차 있습니다. 유행가 노랫말에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떠오르는 당신모습 피할 길 없는 내 마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공의의 하나님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공의보다 사랑이 더 필요합니다. 물론 공의도 사랑이지만 어린아이는 공의가 사랑인 줄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의로우심을 알고 그 의로우심이 곧 깊은 사랑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임을 아는 성숙한 믿음은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고, 원수를 위해 복을 빌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도 자기를 책망하도록 하나님이 보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발람을 태운 나귀가 발람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그릇된 길을 가는 그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바울은 몹쓸 질병인 몸의 가시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깨닫는 것은 반드시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미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게 굴다가 넘어지는 자도 아주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십니다. 사람 같으면 내 버려두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붙들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배신했다가 돌아와서 비굴하게 굽실대는 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하였다고 내치시거나 괘씸죄에 걸어 골탕을 먹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그냥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또한 하나님처럼 자기에게 교만하거나 배신한 사람까지도 용납해주어야 합니다. 하루 동안에 일곱 번 내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신 교훈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으로 느낄 수 있으나 공의는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만유를 선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 뿐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의 눈은 주의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위대하심에 대한 만물의 올바른 반응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0-13).
시골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은 종종 말썽을 부리다가 주인에게 맞거나 혼이 납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주인의 행동을 따라 움직입니다. 소나 닭이나 개나 염소는 그들의 눈을 주인에게서 떼지 않습니다. 주인이 부엌에 들어가면 부엌 쪽을 바라보고 여물간에 가면 그쪽으로 눈이 따라 움직입니다. 주인은 소에게 여물 줄 시간에 여물을 주고, 닭 모이 줄 시간에 모이를 주고, 개 밥 줄 시간에 밥을 줍니다. 그것들이 가끔 말썽을 부리다가 주인에게 맞거나 혼이 나지만 주인의 돌봄을 통해 생존하기 때문에 주인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7-18
사람이 힘 있고 유명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를 하나님께로 향하면 실망하거나 낙심하게 될 일이 없고 참으로 귀한 복이 됩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때로 두려운 분이시며 또한 한 없이 너그럽고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인격 안에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도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룰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러리라고 무의식 가운데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서울 정도로 공의로우신 분이시지만 또한 한없이 너그러우신 분이신데 그 이유는 무서운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의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을 어느 정도 배우고 알게 됩니다. 부모는 때때로 자식에게 대단히 엄격합니다. 엄격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잘못을 무섭게 꾸중하고 나무랍니다. 무섭게 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맞으면서도 부모의 품으로 파고듭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뢰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사랑의 축척된 경험입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돌봄의 손길과 아버지의 깊은 배려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배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조건 없는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속성을 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깊은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의 또 다른 손길임을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깊은 경험적 앎을 통해 하나님께 반해버렸습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이 대화의 주제가 됩니다. 그 하나님을 좋아하고, 너무 좋아서 그 하나님을 노래하고, 자랑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고 온통 그의 삶은 하나님으로 꽉 차 있습니다. 유행가 노랫말에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 떠오르는 당신모습 피할 길 없는 내 마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공의의 하나님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공의보다 사랑이 더 필요합니다. 물론 공의도 사랑이지만 어린아이는 공의가 사랑인 줄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의로우심을 알고 그 의로우심이 곧 깊은 사랑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임을 아는 성숙한 믿음은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고, 원수를 위해 복을 빌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도 자기를 책망하도록 하나님이 보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발람을 태운 나귀가 발람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그릇된 길을 가는 그를 막으시는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바울은 몹쓸 질병인 몸의 가시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깨닫는 것은 반드시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미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게 굴다가 넘어지는 자도 아주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십니다. 사람 같으면 내 버려두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붙들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배신했다가 돌아와서 비굴하게 굽실대는 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하였다고 내치시거나 괘씸죄에 걸어 골탕을 먹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그냥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또한 하나님처럼 자기에게 교만하거나 배신한 사람까지도 용납해주어야 합니다. 하루 동안에 일곱 번 내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신 교훈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으로 느낄 수 있으나 공의는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만유를 선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 뿐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의 눈은 주의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위대하심에 대한 만물의 올바른 반응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0-13).
시골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은 종종 말썽을 부리다가 주인에게 맞거나 혼이 납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주인의 행동을 따라 움직입니다. 소나 닭이나 개나 염소는 그들의 눈을 주인에게서 떼지 않습니다. 주인이 부엌에 들어가면 부엌 쪽을 바라보고 여물간에 가면 그쪽으로 눈이 따라 움직입니다. 주인은 소에게 여물 줄 시간에 여물을 주고, 닭 모이 줄 시간에 모이를 주고, 개 밥 줄 시간에 밥을 줍니다. 그것들이 가끔 말썽을 부리다가 주인에게 맞거나 혼이 나지만 주인의 돌봄을 통해 생존하기 때문에 주인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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