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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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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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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철학이 처음부터 악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악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악이 아무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악은 부정적이지 않을 것이고 피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고통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호기심에서가 아닙니다. 고통 때문에 던지게 된 인간의 이 부정적인 질문은 지식과 문화 창조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논리나 이론적인 부정은 사유의 차원에 머무를 뿐 사물과 그 의미에 대한 경이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시작을 경이(驚異)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존재의 우연성이나 악에 대한 당혹과 놀라움 등이 철학적 사유를 자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끊임없는 고통의 경험은 거의 모든 철학의 근본적인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반드시 그 대답을 발견해야만 하는 심각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별로 없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으로 인하여 불행한 사람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그 해답을 얻어야 하는 심각한 질문으로 “왜 이렇게 불행한가?” 혹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극심한 고통은 우선 그 고통으로부터 피하려는 행동을 하게 하지만,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은 그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자극합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도 궁극적으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언제나 경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경이의 유일한 원인도 아니지만 고통은 언제나 “왜”라고 하는 진지하고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하고 그 결과 지식과 문화를 발전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합니다.

원칙적으로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반응은 고통을 제거하거나 피하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또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예상되는 모든 고통을 고려한다면 인간 행위의 거의 대부분은 고통과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짐승도 고통에 반응하지만 발전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채찍의 고통에 대한 말의 반응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인간의 고통은 많은 발전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극히 부정적인 고통을 긍정적인 결과를 낳게 한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임이 틀림없습니다.

고통 자체만을 제거하거나 피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지만 인간의 가치와 능력은 부정적 고통을 긍정적 결과를 낳도록 하는데서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은 고통 자체만을 제거하려는 처방임에도 불구하고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고통 자체를 극복하기 위해 자살을 택하는 경우입니다. 자살은 고통 제거를 위한 가장 극단적이고 그릇된 행위입니다. 물론 누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노년에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고, 삶이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아 사회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한 사람도 있고, 나라와 주인에 대한 충성심에서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어떤 자살은 인간의 가치를 더욱 고양시킨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로마의 군인이요 정치가였던 카토는 전쟁에서 패하자 자살을 함으로 정적 카이사르를 비열하게 만들었고, 자신은 승리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고통 자체를 못 이겨 자살하는 경우는 비난보다는 동정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어떤 가치를 위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살은 고통에 대처하는 가장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입니다. 그것은 고통이 가질 수 있는 의미까지를 포기하는 것이고 고통과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까지도 포기하는 생의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한 사람을 비난할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자살을 찬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살에 버금가는 비생산적인 태도는 진통제나 술이나 마약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마취제의 개발은 대 수술이 불가피한 환자에게 더 할 나위없는 복이지만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상습적으로 마취제를 사용하는 것은 생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던 어거스틴에게 그의 친구가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하고 돌아간 직후 어거스틴은 한 아이의“집어 들고 읽어라”는 소리를 듣고 곁에 있던 성경을 펴서 로마서 13:13-14절을 읽고 주님을 영접하였으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였습니다. 친구의 질문은 그가 방탕한 생활에서 돌아서는데 길잡이 역할을 하였습니다.

최근 기독교 신자들 중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타깝고 당혹스럽습니다. 자살의 대부분의 경우는 어떻게든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택하였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나 철학에서조차 고통은 인간에게 불가피한 숙명이지만 인간을 더욱 고상하게 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서도 고통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은 채 제거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단순히 고통 그 자체를 제거하려고 마취제나 술이나 마약을 사용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고, 고통을 통해 달성하게 될 목적에 위배되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풍부한 결과를 배태하고 있는 자원을 무용지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여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고통에 의미가 없다면 바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는데 나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은혜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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