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권력에의 접근을 철저히 막은 미국의 민주주의 > 지난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페이스 상패 제이미 제이미혜택



이곳은 2017년 이전에 올려진 아멘넷 오피니언 칼럼 글입니다. 이름으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황상하 | 김동욱 | 최송연 | 허경조 | 이수일 | 송흥용 | 김정국

지난 오피니언

대중의 권력에의 접근을 철저히 막은 미국의 민주주의

페이지 정보

황상하2008-06-23

본문

현대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건국이념은 자유와 평등입니다. 오랫동안 유럽의 봉건 군주의 통치 아래 눌러 살았던 그들은 계급의 사슬이 없는 자유의 땅으로 이주해 왔기에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이나 평민이 구별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의무를 감당하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등사회, 권력의 분산, 자유 권리가 보장되는 이상적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상적인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습니다. 그들이 꿈꾸든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한 것은 헌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었는데, 하나는 권력을 쪼개어 권력이 집중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대중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장점은 권력의 분산입니다. 권력의 분산은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반드시 타락하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뼈 아프게 경험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사람이 책임을 나누어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권력을 분산하여 권력 집중을 막아야 한다는 정신이 곧 삼권분립이고 대통령과 의회는 철저히 서로를 견제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의회는 심할 경우 대통령이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의 수까지도 제한 할 수 있고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와 의회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경우 사법부는 어떤 압력도 받지 않고 행정부와 의회 사이의 문제를 공정하게 판정할 수도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일반대중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원칙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데 나라의 주인인 일반대중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역행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 제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철저하게 일반대중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국민의 다수가 힘을 모아 국회를 점령한다거나 국가 정책을 바꿀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뽑을 수 있는 지도자는 임기 2년인 하원의원과 임기가 6년인 상원의원 3분의 1을 매 2년마다 선출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국민이 모두 공화당을 찍는다고 해도 상원의원 3분의 1만 바뀔 뿐 3분의 2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원의원을 한 당이 다 차지하여 혁명적 개헌안을 통과시켜도 상원이 버티고 있고 대통령의 거부권이라는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상원을 거치고 대통령의 제가를 거치기까지는 하원의 2년 임기로는 현실적으로 혁명적 개헌안이 통과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대중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하는 미국의 제도입니다. 이런 제도 아래서는 부시와 알 고어 대통령 선거와 같이 다수가 소수에게 지는 비민주주의와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되기도 합니다. 1824년 선거에서도 앤드루 잭슨이 득표에서 앞서고도 낙선하고 존 애덤스가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득표에서 앞서고도 낙선한 대통령 선거가 미국 역사에 네 번이나 있었습니다.

미국의 헌법과 제도가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 원칙에 근간을 두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일반대중을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철학자들은 한 사람의 왕이 다스리는 왕정보다는 귀족들에게 권력이 나누어진 정치를 나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나은 것은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 조직이나 정부 형태가,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는 일반대중, 즉 평민들에 의해 선택되는 것은 매우 불행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바른 판단에 따른 선택이라기보다 여론과 환경에 의해 좌우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일반대중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초래될 무정부 상태였고 그다음으로 경계한 것이 전제 정치였습니다. 홉스나 록크 같은 철학자들도 무정부 상태를 매우 경계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고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헌법의 그대로 반영되었지만 무분별한 개인의 집합인 대중의 힘이 직접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렇게도 철저히 막은 것은 무정부 상태를 경계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온 국민이 쇠고기 협상 때문에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때 그런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아무리 공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해도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가 되는 것은 쇠고기 수입 문제 자체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장점은 여러 사람이 책임을 나누어 지는 것인데 모두가 한 사람 지도자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쇠고기 수입 협상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 대통령이 선거운동에 개입되었다고 하여 대통령을 탄핵하였습니다. 그 때도 대통령이 비록 잘못을 하였지만 탄핵받을만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컸고 그들의 논리가 지배적이었기에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쇠고기 정국도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은 했지만 촛불 시위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고 대통령 퇴진까지를 운운하는 것은 한 마디로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외람되지만 참 속상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좀 더 지혜로웠다면 반 노무현 정서에 편승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집권 초기에 벌어진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문제는 단순한 쇠고기 협상 문제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민주국민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선거에서 뽑힌 대통령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한 것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처리하여 법대로 처리하면 될문제였고, 쇠고기 협상 문제도 국회서 다루면 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의 촛불 시위는 모든 국민이 그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고 능력 있고 나라와 국민을 더 생각하는 거처럼 시위하는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촛불을 든 국민은 다 애국자들 같습니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회에서 따지면 될 것이고 따져서 안 되면 비준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을 벌이면 될 것입니다.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여 판매하게 될 경우 국민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사 먹지 않을 국민이 얼마나 될지 미지수지만 국민의 힘은 미국산 쇠고기 불매 운동으로 발휘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촛불 시위보다 그것이 더 바른 민주시민 정신이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쇠고기 협상문제에 대한 반대를 대통령을 불신하는 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사사건건 국민들이 여론을 몰아 지도자의 통치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아니고 지도자가 부족하고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인내하며 믿어주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과 이웃에게 정직하게 사랑의 비판 정신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의 언사가 그렇게 거칠어졌는지, 왜 자기와 의견이 같지 않은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보수를 이해하는 진보, 진보를 이해하는 보수는 될 수 없는지, 무엇보다 교회가 취해야 할 입장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를 위하기보다 남을 위하는 모두가 되고 특히 그러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하 나님 나라의 능력은 인종적 사회적 성적 지역적 차별의 장벽을 극복합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진영을 만들고 서로를 차별합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사회를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인종적으로, 사회적 계층으로, 성적으로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이러한 장벽들을 무너뜨리면서 서서히 그리고 당당하게, 그러나 보이지 않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 막 4:26-27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