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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효의 부정적 역할을 경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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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7-05-14

본문

아들이 구타당한 것에 대하여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보복폭력을 가했던 재벌그룹의 회장이 구속되면서 남긴 말은 “다시는 나 같은 어리석은 애비가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말처럼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아버지였습니다.

모든 아버지는 자식이 맞고 들어오면 당장 달려가 아들을 때린 놈을 혼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치로 보아도 아이들 싸움에 부모가 끼어들어 자기 자식의 역성을 들어 어른 싸움이 되게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재벌의 회장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생각한다면 맞은 아들을 나무라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 짓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였을 것입니다. 재벌그룹의 회장이 폭력 범죄로 구속된 초유의 사건이라는 면에서 뿐 아니라 자식에게 집착하는 성숙하지 못한 오늘의 아버지상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자식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효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식의 태도는 여러 면에서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재벌 그룹 회장의 구속 사건은 강요된 효도의 부작용이 거꾸로 나타난 경우라 하겠습니다.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제정된 후천적인 제도들 가운데 법률은 가장 효과적인 질서유지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법률은 타율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킬 위험성이 있고 또한 인간관계를 경직시키며 경제적 비용이 많이 드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법률만큼 강력하지는 못하나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질서를 세워주는 것은 역시 도덕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도덕보다 구속력이 약하긴 하지만 예의도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사회적 규범입니다.

예의는 거의 자발적이기 때문에 사회질서를 유지시켜주는 데 있어서 부작용이 적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매우 다양하고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윤리나 도덕의 덕목이나 규범도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는 시대와 경제와 사회적 차이에 관계없이 항상 요구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특정한 문화나 특정한 시대에만 타당하거나 특별히 강조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살인, 도적질, 거짓말은 문화나 시대의 구분 없이 항상 금지되었지만, 남존여비 사상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랐습니다. 따라서 모든 시대와 문화에 항상 타당한 것을 윤리라 부르고 특정한 시대나 문화에만 타당한 것을 예의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효가 지나치게 강조된 유교문화권의 영향 때문에 효도의 문화상대적 위치에 대해 인정하려 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효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강조되어왔습니다. 어느 시대에도 효는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공장에서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양육되어지는 시대가 온다면 모르겠으나 부모에 의하여 자녀가 출산되고 양육과 교육을 받는 것이 변하지 않는 한 부모에 대한 자녀의 효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효를 단순히 여러 가지 덕목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덕목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단순히 자식을 낳고, 양육하고, 보호해 주는 恩人정도가 아니라 하늘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종교적 숭배의 대상에 가깝습니다. 이런 유교적 가치관 아래서는 효도 자체가 올바른 정치요 선행이며 정의였습니다.

논어에서는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순하면서도 윗사람을 범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고, 효경에서는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업신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동서양은 물론 어느 종교나 문화에도 전통적인 중국과 한국 사회만큼 효를 강조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효는 정직이나 정의처럼 보편적으로 강조되지는 않았습니다. 효는 혈연관계에 기초한 윤리적 덕목으로 씨족사회 혹은 가족중심사회에서는 인간관계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간의 접촉이 거의 가족 및 씨족 간에서만 이루어지던 단순한 사회구조 아래서는 가족이나 씨족외의 타인과의 관계가 개인의 생존과 행복증진에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혈연을 강화하는 덕목들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는 가족 혹은 씨족 중심의 사회가 아니며, 원시적인 인력에 의존하는 농경중심의 경제구조를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원인들에 의한 핵가족화 현상으로 부모가 생활력을 상실할 연령에 이를 즈음에는, 효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개인들의 활동반경도 가족이나 씨족의 범위를 넘어 전 세계를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고, 사회조직도 복잡해져서 익명적이고 법적이며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으로 탈바꿈하고 온갖 가치와 이론들이 하나의 무대 위에서 서로 힘을 겨루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효가 상대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효만으로는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효보다 정의를 더 강조해야 인간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류사에서의 효 사상의 긍정적 역할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겠으나 효 사상의 부정적인 면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편중된 경애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사회에서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위계적(位階的) 인간관계가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간의 이해관계가 주로 법질서에 의하여 조정되고 있습니다.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정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정직이나 인명존중 등 다른 보편적인 덕목들도 그 자체로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덕목들도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의 한 요소이며 정의구현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집니다. 현대사회에서 다른 덕목들이 아무리 잘 지켜지더라도 그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면 거기에는 진정한 평화가 불가능하고 개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로 개발하거나 발휘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정의는 물론 현대사회에서 처음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에 대한 공정한 재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대한 이론적 정의 등은 고대사회에도 정의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고아, 과부, 외국인등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는 것을 정의로 간주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평등한 관계에만 정의를 국한하였습니다.

현대에도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평등을 강조하는 평등주의적 정의와 개인의 공헌이나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강조하는 공적주의적(功績主義的) 정의가 있어 서로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평등주의적 정의를, 자본주의는 공적주의적 정의를 더 중요시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확대된 정의의 이해는 다른 사람에게 직접 혹은 간접으로 “부당한”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질서가 있는 사회가 공정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법과 공인된 도덕적 관행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수평적 인간관계의 질서유지에 기능하는 정의의 원칙은 수직적 관계에 유효한 효와 양립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양을 훔치는 아비를 자식이 숨겨주는 것이 정직이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은 효를 위해서는 정의를 희생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효에 충실하다가 정의에 어긋나게 행동할 수 있고, 지나친 효의 요구가 자식 혹은 다른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본인권에 있어서 부모와 자식 양자는 비슷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 정의의 원칙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모가 자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 간에 모든 것이 평등할 수 없고 또한 평등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효의 지나친 강조는 자식의 기본권조차도 무시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가 성장한 자녀의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며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식이라도 하나의 인격체가 향유해야 하는 명예와 자존심, 사회의 구성원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효의 이름으로 침해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효 때문에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의 요구에 따르거나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법을 어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가능합니다.

유교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경쟁이 심각한 것은 효와 관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부정행위를 하여 좋은 성적을 받으려 하고, 직장인들은 공정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진급을 하거나 치부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정과 부패의 원인가운데는 효가 그 동기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이것을 훼상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며, 입신하여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날려, 이로써 부모를 빛나게 함이 효의 완성이니라.”고 한 효경(孝經)의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근로의욕(勤勞意慾)과 교육열을 증진시키는데 공헌을 했지만 동시에 지나친 경쟁심을 야기 시키고 나아가서 부당한 방법으로 입신(立身)하려는 유혹을 키웠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정당한 기회와 권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효 때문에 부모의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돕거나 동조하거나 숨기는 경우인데, 효의 절대화와 부모에 대한 절대적 순종은 부모가 다른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했을 때 그것을 막을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돕고 동조하고 심지어 숨겨야 할 경우가 발생합니다. 공자는 부모의 부당한 행위를 숨기는 것 안에 정직이 있다고 했지만 아무리 효가 중요하더라도 오늘날의 정의의 원칙에서 그런 정직은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효가 점점 무시되고 있는 때에 효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효의 긍정적 역할을 위축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효가 다른 모든 가치를 침해하는 것까지 정당화 되는 것은 효가 무시되는 경향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바른 효 사상을 세우기 위해 효의 부정적 역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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