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역자로서의 국가와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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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2-12-1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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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코네티컷 뉴타운에 있는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은 온 미국 국민을 참담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 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경제력과 군사력과 첨단과학으로 북한이나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의 인권을 문제 삼으면서 정작 본토에서 무고한 어린아이가 한꺼번에 20명이나 참혹하게 죽는데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기껏 경찰이 할 수 있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정도입니다. 이제 또 한동안 개인의 총기 소지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역시 흐지부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인권을 강조하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중하게 여긴다고 해도 무기를 만들거나 팔아서 돈을 버는 이들의 이기심을 억제하는데 어느 정부도 역부족인 모양입니다.
인간 생명과 인권을 가장 강조하는 초강대국 미국 정부가 정작 본토에서 자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한 때 무기 생산으로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코네티컷 주 부자 타운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누구나 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총을 가질 수 있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정부라도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컬럼바인 하이스쿨, 버지니아텍, 그리고 샌디 훅 엘리멘트리스쿨에서 일어난 총기사건에서는 아무런 원한이나 이해관계조차 없는 무고한 학생들이 표적이 되고 희생되었습니다. 인간이 총을 만든 이상 총기사고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총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면 이런 잔혹한 대형범죄는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어떤 정부도 개인이 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국가만이 악한 자를 벌주는데 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습니다. 악한 자를 벌주고 악을 억제하는데 사용하라고 국가나 통치자에게 칼을 주었습니다. 이 칼은 오늘날로 말하면 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 합법적으로 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총을 소지하거나 사용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규제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개인의 총기소지를 금하는 법 제정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습니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국가와 통치자의 가장 우선되는 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최우선으로 보호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안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치안은 경찰력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경찰력이 강화되면 범죄 수단도 강화됩니다. 여러 면에서 범죄를 예방해야하지만 대량살상무기를 개인이 소지하지 못하도록 금해야 합니다. 총은 칼이나 다른 흉기에 비하면 대량살상무기입니다. 누구나 원하면 그런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인간 생명의 안전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한 사람이 칼을 가지고는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해할 수 없습니다. 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대형 살인 사건을 예방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줄이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분명한데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그런 지도자를 뽑지 말아야 하고 지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국가와 통지자의 가장 우선적인 존재 목적은 경제발전도 복지정책도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도 아니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치안 유지입니다. 치안은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목적은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국가의 모든 정책은 약자를 보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평도 약자를 위한 것입니다. 힘 있는 자와 부자에게는 정의나 공평 같은 것이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자는 정의나 공평이나 치안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정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국가와 통치자에게 칼을 들려주면서 악한 자를 벌주고 약한 자를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국가나 통치자가 완전하거나 탁월하지 못해도 기본적으로 악한 자에게 벌을 줄 수만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탁월하고 능력이 있어도 악한 자에게 벌을 줄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에게 벌주는 것이 국가와 통치자의 우선되는 임무라는 사실은 타락을 전제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십계명도 하라는 명령보다 주로 하지 말라는 금지법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찍이 독재보다 나쁜 것이 무정부상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 같은 철학자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고 하였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은 자연권을 어느 정도 양도하는 사회적 계약을 맺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독재가 무정부 상태보다 낫다고 해도 그것을 빌미삼아 독재를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보호하도록 국가와 통치자에게 힘을 주었는데 국가나 통치자가 그 힘을 약자를 보호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효용성을 높이는데 사용하거나 힘 있는 자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약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힘이 인간에 주어졌을 때 그 속성상 부패하고 오용될 위험이 너무 큽니다. 힘이 하나님의 사역자인 국가나 통치자에 의해 정당하게 사용되면 인간 복지에 기여하지만 부패하고 오용되면 양육강식의 상황을 만들어 약자를 희생자로 만드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국가나 통치자에게 주신 힘이 오용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인류는 아직까지 민주주의보다 나은 제도를 발명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통치의 도구로서의 힘을 분산하는 것이고 모든 책임을 모두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지도자를 비롯하여 누구라도 잘못하면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장점입니다. 하지만 내가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여 무조건 사사건건 반대하는 것을 성숙한 민주시민의식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도 상당할 정도로 민주주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가 민주주의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을 채택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성경의 가르침의 차이는, 민주주의에서는 백성을 주인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왕권에 우선권을 둔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국가관과 교회관은 예수님의 왕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악한 자를 벌주는데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벌은 받는 사람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하면 벌이 아닙니다. 나 같은 서민이 운전 중 속도위반을 했다면 100불짜리 티켓이면 충분히 벌이 됩니다. 하지만 부자에게는 1,000불 짜리 티켓이라야 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벌이라면 만 불 정도는 되어야 벌이 될 것입니다. 벌이 벌이 되려면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핀란드에서는 젊은 부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교통법을 위반하여 수 만 불의 벌금을 냈다고 합니다.
법이 공평하려면 그렇게 되어야 공평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그런 법을 만들려면 수 십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법을 어길 경우 그 벌은 범법자가 누구이든지 두려워 할만 해야 합니다. 경찰 검찰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까지도 범법은 두려워야 합니다. 그래야 법이 법으로서 효과가 있습니다. 국가와 통치자는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범법 행위에 대한 벌을 모두가 두려워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악한 자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하되 그리스도인은 통치자나 벌이 두려워 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양심을 따라, 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로마서 13:4,5-
인간 생명과 인권을 가장 강조하는 초강대국 미국 정부가 정작 본토에서 자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한 때 무기 생산으로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코네티컷 주 부자 타운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누구나 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총을 가질 수 있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정부라도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컬럼바인 하이스쿨, 버지니아텍, 그리고 샌디 훅 엘리멘트리스쿨에서 일어난 총기사건에서는 아무런 원한이나 이해관계조차 없는 무고한 학생들이 표적이 되고 희생되었습니다. 인간이 총을 만든 이상 총기사고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총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면 이런 잔혹한 대형범죄는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어떤 정부도 개인이 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국가만이 악한 자를 벌주는데 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습니다. 악한 자를 벌주고 악을 억제하는데 사용하라고 국가나 통치자에게 칼을 주었습니다. 이 칼은 오늘날로 말하면 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 합법적으로 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총을 소지하거나 사용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규제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개인의 총기소지를 금하는 법 제정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습니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국가와 통치자의 가장 우선되는 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최우선으로 보호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안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치안은 경찰력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경찰력이 강화되면 범죄 수단도 강화됩니다. 여러 면에서 범죄를 예방해야하지만 대량살상무기를 개인이 소지하지 못하도록 금해야 합니다. 총은 칼이나 다른 흉기에 비하면 대량살상무기입니다. 누구나 원하면 그런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인간 생명의 안전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한 사람이 칼을 가지고는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해할 수 없습니다. 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대형 살인 사건을 예방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줄이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분명한데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그런 지도자를 뽑지 말아야 하고 지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국가와 통지자의 가장 우선적인 존재 목적은 경제발전도 복지정책도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도 아니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치안 유지입니다. 치안은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목적은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국가의 모든 정책은 약자를 보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평도 약자를 위한 것입니다. 힘 있는 자와 부자에게는 정의나 공평 같은 것이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자는 정의나 공평이나 치안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정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국가와 통치자에게 칼을 들려주면서 악한 자를 벌주고 약한 자를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국가나 통치자가 완전하거나 탁월하지 못해도 기본적으로 악한 자에게 벌을 줄 수만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탁월하고 능력이 있어도 악한 자에게 벌을 줄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에게 벌주는 것이 국가와 통치자의 우선되는 임무라는 사실은 타락을 전제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십계명도 하라는 명령보다 주로 하지 말라는 금지법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찍이 독재보다 나쁜 것이 무정부상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 같은 철학자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고 하였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은 자연권을 어느 정도 양도하는 사회적 계약을 맺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독재가 무정부 상태보다 낫다고 해도 그것을 빌미삼아 독재를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보호하도록 국가와 통치자에게 힘을 주었는데 국가나 통치자가 그 힘을 약자를 보호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효용성을 높이는데 사용하거나 힘 있는 자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약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힘이 인간에 주어졌을 때 그 속성상 부패하고 오용될 위험이 너무 큽니다. 힘이 하나님의 사역자인 국가나 통치자에 의해 정당하게 사용되면 인간 복지에 기여하지만 부패하고 오용되면 양육강식의 상황을 만들어 약자를 희생자로 만드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국가나 통치자에게 주신 힘이 오용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인류는 아직까지 민주주의보다 나은 제도를 발명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통치의 도구로서의 힘을 분산하는 것이고 모든 책임을 모두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지도자를 비롯하여 누구라도 잘못하면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장점입니다. 하지만 내가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여 무조건 사사건건 반대하는 것을 성숙한 민주시민의식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도 상당할 정도로 민주주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가 민주주의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을 채택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성경의 가르침의 차이는, 민주주의에서는 백성을 주인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왕권에 우선권을 둔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국가관과 교회관은 예수님의 왕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악한 자를 벌주는데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벌은 받는 사람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하면 벌이 아닙니다. 나 같은 서민이 운전 중 속도위반을 했다면 100불짜리 티켓이면 충분히 벌이 됩니다. 하지만 부자에게는 1,000불 짜리 티켓이라야 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벌이라면 만 불 정도는 되어야 벌이 될 것입니다. 벌이 벌이 되려면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핀란드에서는 젊은 부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교통법을 위반하여 수 만 불의 벌금을 냈다고 합니다.
법이 공평하려면 그렇게 되어야 공평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그런 법을 만들려면 수 십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법을 어길 경우 그 벌은 범법자가 누구이든지 두려워 할만 해야 합니다. 경찰 검찰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까지도 범법은 두려워야 합니다. 그래야 법이 법으로서 효과가 있습니다. 국가와 통치자는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범법 행위에 대한 벌을 모두가 두려워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악한 자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하되 그리스도인은 통치자나 벌이 두려워 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양심을 따라, 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로마서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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