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은 과연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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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09-08-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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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와 교회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방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본다.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님들도 있고, 반대로 방언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방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은사주의', 심지어 '신비주의'로 몰아가며 방언은 초대 교회로서 중단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서로서로를 경계하며 손가락질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방언의 유익과 주의점" 에 대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같이 생각하며 나누어 보려고 한다.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과 혼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작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28절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했고,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혼 (이성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그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全能)하나님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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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
2009-08-18 00:42
70.xxx.248
별똥별님 ,
방언에 관한 이 글을 읽어면서...
믿음이 조금씩.. 성장 해 가는 저의 모습 속에..
혹시나, 저에게 교만이 들어 와 있지나 않는지...
신중이 생각하면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곳곳마다...성경을 토대로 하여 주시니 ......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별똥별님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 ....
이 글을 copy 하여 .... 다른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별똥별님, 귀한 글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irene님의 댓글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처럼달처럼
2009-08-20 09:44
71.xxx.242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에 대해 누구가 삐딱선을 타겟어요? 누구나 다 아멘으로 받아야죠....
아침이슬
2009-08-25 02:08
75.xxx.239
많은 교회에서 방언을 참! 많이 추구하고 있더군요.
글쎄요!!!...
주님께서 저에게 방언을 주시면 받겠습니다만.....
그렇게... 원하는 마음이 생기지가 않더군요.
그냥 저는 조용히 ... 주님께 저의 모든 것을
고해 올리렵니다.
저의 방언은 (전도)하는 곳에 사용하렵니다...
방언을 그렇게 처음부터 받아들였구요....
....
별똥별
아침이슬님....
(-저의 방언은 (전도)하는 곳에 사용하렵니다...-)
본 글에 보면,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라는 문장이 있어요.
아침이슬님과 같은 생각이라고 하겠네요.
방언은 모국어를 포함한 세상방언과 성령님의 선물로서
주시는 영의 방언으로 분류할 수 있어요. 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도용의 방언이, 모국어를 지칭하시거나 아니면 주님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을 말씀하시거나, 각종 방언들을
총동원, 전도에 사용되어 질 수만 있다면...가장 아름답고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네요. 초대교회에 첫 방언의 선물이
전도로 사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지요. (행 2: 1-13절)
영으로 방언을 주신 목적도 교회(개인, 회중)의 유익을
8/25 13:46
66.xxx.18
별똥별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유익...최대의 유익은 바로 영혼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 위에 오신 목적도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다만, 전도에 사용되어지는 방언이 모국어냐
아니면 성령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이냐 하는 것인데요.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성령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모국어로 들려졌느냐,
아니면 사도들 포함,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입으로 각 나라
방언을 말했느냐, 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큰 이슈로서 논란이 되고 있구요, 저는 성령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을 말했으나, 듣는 이들의 귀를 열어 주셔서 각자가 자기 나라 방언으로 들려졌다고 하는 쪽을 지지하고 있어요, 이것이 사도행전 적인 전도방언 견해라 할 수 있지요
irene
2009-08-17 20:26
141.xxx.181
일반적으로 은사중단론(계시적은사중단론)을 주장한다고 알려진 개혁주의를 추구하시는 신학자나 목사님들 중에서도 방언은사를 당연히 인정하시는 분들로 많습니다.
다만 계시적으로 사용된 정경이 완성되기전의 그러한 역할의 방언과 통역은 없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언은 오늘날도 영의 언어로서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통역도 가능할것입니다
통역은 항상 통역이 다 될수도 없을것이고 항상 통역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것은 그대로 믿습니다
하지만 매사를 직통계시처럼 방언통역이나 예언을 받아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신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미래의 일들을 미리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만일 한두번 미래를 맞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려려 올무가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을 때에는 꿈이나 환상이나 말씀을 통해서나 환경을 통해서나 반드시 가르쳐 주실것입니다
가르쳐 주시지 않는것은 그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으러 다니거나 방언통역을 받으러 가는 행위는 점치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으며 바로 불신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모님의 균형잡힌 글에 공감을 합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말씀으로 믿는자의 표적으로 오늘날도 믿는자는 방언을 다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모든 믿는 사람이 다 뱀을 집어야 하며
독을 마셔도 안죽어야 하면 귀신을 다 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손만 앉으면 다 나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에게 완전히 적용된것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본질적인 의미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수 있고 독이 가득한 세상속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니까요.
한편 새방언이라는 뜻도 거듭난자의 언어로도 해석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도 오순절다락방사건으로 바벨탑사건으로 흩어진 언어에 대하여 회복의 그 방언일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방언의 유무가 신앙성숙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신앙행위의 열심과는 어느정도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면 개인의 기도생활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도 사모님이 인용하셔서 언급한 그내용, 주위에 방언을 많이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을 굳이 비교하자면 은사강조하는 사람들의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과 신앙인격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은사는 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며 각 개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이 지 은사가 목적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방언은사뿐 아니라 많은 은사가 성경에 나와 있고 하나님은 믿는자에게 필요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은사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life라는 기본적인 명제를 생각하면 굳이 방언에 목숨걸 필요도 없고 반대로 방언을 부정적으로 바라봐도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성령의열매
2009-08-17 18:23
24.xxx.127
저는 아직 통역을 하는 방언을 받지
못했기에 방언하는 것을 자제하는편
이었습니다.
하지만 " 성령을 찾아서" 라는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방언하는것을
소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모님의 말씀데로 방언에 대해
올바로 인식을 한다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뜨거운 임재를
체험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은사를
모두에게 골고루 주셨기에 각자 받은
은사안에서 주님에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것이 주님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열정을 잊지않고 날마다 주님 말씀안에서
하루 하루를 주님을 위해 기쁘게 살며
내 이웃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멘넷 여러분들 모두 주님이 주신 은사안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세워주는 귀한 형제,자매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침이슬
2009-09-01 12:16
75.xxx.76
그 푸른 잎들은 ....생명 수를 끌어 올리고 있는
뿌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일들을 아시고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심을 .....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제 자신에게....
물어 보고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agok
2009-08-18 02:24
24.xxx.132
방언은 언제나 흥미로우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주제로서 그리스도 편지님 지적처럼 득보다 실이 더 많은
논쟁으로 치닫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기왕 이런 주제가
아멘넷에 다시 나왔으니 이번에는 균형잡힌 관점에서
보다 실질적인 유익이 더 많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방언이 하늘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책이 나오더니 곧 그
반대격으로 성경에 나오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그 당시 기존하여 사용되어진 외국어라는 견해를 담은 책이
나와서 방언하는 분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었는데 ...
마침 별똥별님과 아이린님께서 방언을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사의 하나로서 보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방언을 외국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로 보시는
견해를 말씀하시니 저도 두 분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거짓방언도 존재하고 인위적인 방언,거짓방언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은사집회들도 있으니 분별하고 경계해야
하지만 방언은사가 사도시대 이후, 정경완성이후로 중단되었고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도
더불어 경계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방언은사 중단론자나 무용론자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분들과 대동소이한 방언관을 가지고 있으리라 보는데
이 방언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또 문제가 되는 점이
바로 신자의 방언 필수 의무론과 당연 권리론인 것 같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해야한다는 방언 필수 의무는 성경이
신자에게 짐 지워준 의무라고 보지 않고 방언하지 못하면
구원받은 신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보고
있으며 만약 방언이 신자의 의무라면 그런 중요한 신자의
의무가 "다 방언 말하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또는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식으로 쓰여지는 대신 다 방언은사를
받아서 방언을 해야만 한다로 적극 장려되어 나오고 다른
서신서에서도 강조되었으리라 보는 입장입니다.
전에 김삼 목사님께서 "방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기에 저는 그 주장을 신자방언 필수 의무론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여 반론을 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신자의 방언 의무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할 수 있다 라는 신자 방언
당연 가능성 또는 권리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제가 이 방언론에 대해 김삼 목사님의 견해를 이해 못하고
왜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가 의문을 품었을 때에
별똥별님과 잠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별똥별님께서도
방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고 모든 거듭난
신자에게는 방언의 주체가 되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기에
방언을 할 수 있는 잠재능력이 있으니 더디하든
빨리하든 모든 신자들은 그 가능성을 인식하며 살으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별똥별 사모님께서 이번 칼럼에서 방언에 대한 주제를 다루어
주셨으니 좀더 깊게 들어가서 과연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지 ,
신자의 방언 당연 가능성, 잠재성,권리에 대해서도 고견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직도 방언을 못하고 있어서 그런 점들이 궁금합니다.
아침이슬
2009-09-01 12:05
75.xxx.76
가을이 성큼 들어 섰습니다.!!
젊음을 마음껏 자랑이라도 하고 있던 푸른 나무 잎들이
누구한테.... 야단을 맞은 듯이 얼굴을 붉이기 시작
하는 군요.
마음껏 즐기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 언젠가... 소리
없이 다가 올 주님의 그 시간..... 항상 준비하는 자세가
되어 있길.... 저의 자신을 재촉 해 봅니다.
별똥별님 , 귀한 글들로도 (주님의 말씀) 약해저 가는 많은
영혼들을 충전을 시켜 주시길 기도 올립니다.
별똥별
2009-08-18 03:13
66.xxx.18
반갑습니다, 자매 아곡님. ^^*
저, 별똥별에게 방언은사와 통역의 은사도 겸하여 허락해 주신 성령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이것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다른 뜻은 없구요, 방언론을 다루는 것은 알지 못하고 다루는 것이 아니기에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니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
아곡님께서 (요즘 자주..ㅋㅋ, 다른 분, (ks) 김삼 목사님의 존명을 정확히 거론을 하셔서 저도 어쩌는 수 없네요.ㅎㅎ), 저는 김삼 목사님과 방언 문제를 두고 심한 마찰을 빚었고, 그것 때문에 주님께, 오래도록 기도해 오던 중, 어느 날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응답은, 다음 두 가지 단어였습니다. “신생아” 그리고 “ability”란 단어였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주님께서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다 성도가 아니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이 아니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이것을 신학상 술어로는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가 거듭난 성도인가? 아니면 성전 마당만 밟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하고, 우리가 거듭나게된 것이 무엇으로 되었는가?하는 것을 알아야하며, 우리 속에 내주(in dwelling)하고 계신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는 주님이 께닫게 해 주신 ‘신생아’ 와 ‘ability’를 생각해 보십시다.
아이가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는 우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태어날 때, 이미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ability’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동안 속에 잠재되어 있는 즉, 우리속에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점차 개발해 나가는 것 뿐이고요. 그러나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들은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를 않고 태어나기에, 다 성장한 후가 아니라,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인간처럼 아름다운 언어들을 습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동물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realized or unrealized ability)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화설’의 허구도 알게 됨)
물론, 이 말 속에는 반드시 거듭난 성도여야만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져야만 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여도 그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in dwelling)이 안 계시다면, 성령님의 속성중 하나인 방언을 할 수 있는 ability가 처음부터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방언은 누구의 선물입니까? 예, 성령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한 번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리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 난 사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속에는 반드시 영적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가지고 태어 난 영적 신생아이입니다! 왜요? 만약 인간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이 성령님께로부터라면,(영계에는 천사의 방언도 있고, 사탄의 흉내방언도 있기에,) 그 방언의 주체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예수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으로 보지를 않고(육안으로 알 수가 없기에),'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성도’라는 시각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아직도 저, 별똥별은 김삼 목사님의 주장하시는 모든 부분을 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치유사역 부분’ 문제라든가 '십일조 문제'라든가 여러가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 구원론이 같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절 말씀)” 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힘써"라고 하는 부사는 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지요.
인간의 논리나 판단은 언제나 미숙하지만,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정확무오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unrealized ability’, 라는 단어와 필수(essential, or requirement)단어의 의미도 확실히 구분하고 이해 하게 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이런 사실을 알지 못할 때, 방언은 성도의 필수라 착각하게 되고 그럼에도 자신이 방언을 할 수 없음에 불안해 지고 이런 심리를 이용한 자칭 은사자들이 그들에게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반드시 방언을 해야만 성도라 인정을 받는다고 속일 수 있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우리(성도)의 속에 계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시면, 그분은 각종 은사의 주체십니다. 당연히 내 속에 “unrealized ability"가 있다는 것이구요,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그분의 선하신 시간대 속에, 방언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직 그분의 뜻대로!!!!
agok 그렇다면 "방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라는 견해에는
일단 동의하시는군요.
[이로써, 마가복음 16장17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믿는 자는 반드시 방언을 해야한다.’라고 주장하시는 김삼목사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틀을 깰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깨달음에 의해 방언이 은사의 관문임을 인정하면서 거듭난 신자안의 미처 깨닫지 못한 능력을 언급하시며 이런 주장도 하셨기에 저는 별똥별님이 방언필수론을 긍정한다고
생각했었는데....좀 헷갈리네요.
8/18 05:30
24.xxx.132
agok 제가 예전에는 왜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가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가 김삼 목사님과 별똥별님과의 토론을 통해 그런 가능성을
고려해 보게 되었고 지금은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라는
견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신자가 은사를 받아 누릴 수 있는 권리인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인가
하는 문제에서 헤매고 있는 상태 , 8/18 05:37
24.xxx.132
별똥별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말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 5- 이하)"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도 신학자들이
수세기를 두고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김삼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별똥별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권면해 드립니다...먼저, 단어 해석이 주는 뜻부터
잘 이해 되도록,
주님께 기도하여 깨달음 얻기를 구하세요.
저는 분명, 김삼 목사님이시라면, 성령님께서 저를 통하여 주신 말씀,
(unrealized ability)의 뜻과 필수(essencial, or requirement)란 단어의 뜻이 같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그리 믿고 있습니다만....
그 차이점을 아곡님께 이해 시켜드릴 능력이 제게는 없는 것 같네요...^^
8/18 12:23
66.xxx.18
별똥별 아, 이 뜻은요,
저는 지금도 김삼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말씀이고요...
그럼에도 김삼 목사님께서는 제가 드리는 말씀으로
약간 수정해 주실 의도는 없으실 것이란 뜻도
내포되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약간만 수정하라고 하시면, 어렵겠지요?
저는 (unrealized ability)의 뜻과 필수(essencial or requirement)
같은 뜻이란 느낌이 들지 않으니까요, 제가 오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삼목사님의 십일조 관도, 저와 아주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근소한 차이가 있지만요, 그 약간이..
이것이, 직접 대화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대변인으로 의의를 제기하는 것과의 차이점일 수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8/18 13:32
66.xxx.18
agok
어쨌든 방언에 대해서 나름대로 설명해 주시려고 이리 답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똥별 사모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짐보
2009-08-20 20:09
204.xxx.179
몇번 댓글을 달려고 하면
분주한 직업적인 일로 미루다 번복되고
다시 글을 읽고 글을 올리려니 어떤 얘길를 할려 했는지
이제 다 잊어버렸습니다. ㅎㅎ
오래전
방언하는걸 구경도 못하던
교회만을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기도원을 간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은
완성도 되지 않었는데,시장통 처럼 북적 거렸습니다.
강단같은 커다란 방에
몇백명이 앉고 누워서
밥도 먹고,성경도 보고,얘기도 하고,,,
여기 저기에서 시도 때도 없이
"랄라 ~쌀라" 하는 방언기도는
제게,신기하기도 했지만 정신을 빼놓기도 했습니다만
이상한 언어(?)에 별 생각을 다 했구요.
저야, "바울같은 믿음"을 달라는 기도제목으로 갔지만
거기에 모인 대부분의 분들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사고로
육체적인 치유를 목적으로 오신 분들도 있고
정신적인 질병 -특히 간질병-으로 치유를 위해
금식기도를 하기위해 지방에서 오신 분들도 많었기에,
그분들의 방언기도를 할때에는
정말 시장통 보다 더 시끄러워
기도도 할 수없고
멍하게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때론 어느분은 방언은사를 받는 다고 토굴속으로 들어가서
밤새 목놓아 통성기도 하시고
어느분은,밤을 새워며 소나무 밑둥을 잡고 기도하며
울고 부르짖으며 '주여! 주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방언을 받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소나무 하나를 뽑아야 방언이 터진다고,,,
그중에 방언못하는 저는 믿음이 약한 부실한 신자였고
그당시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신자도 아니다는 시절,
저도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조용 조용히 하는 방언을 주십시요.
시끄럽지 않은 방언을 주시어서
주위사람 방해하지 않게 하여주십시요]
결론을 방언을 받지도 못했고
소나무도 뽑지 않았구요 ㅎㅎ
어느날은 -영어와 일어를 잘 하는 방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기도 했는데 그것도 못받구여 ㅎㅎ
어느날은 -믿음의 확신-을 위해
예수님을 협박하는 기도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방언을 주시지 않아
제 믿음 은 날날리 믿음이 되었습니다.
제게 뭔가 확신을 주십시요.
이 기도가 끝날때 까지
무엇을 응답하시던가 뭔가를 보여 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믿는 믿음이란
세뇌교육이라 고 판단하겠습니다! ]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떠듬거리며 기도하다
이것 저것 생각나는 성경귀절도 인용하고
제 심정을 하소연 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난 모든 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생각나지 않는 죄도 기억을 되살리려 기도하고,,,
어느듯
기도하는 말이 빨라지고
그 생각을 혀가 쫓아가지 못하고
생각 자체가 기도가 되고,,,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는 순간,
시간마쳐 멈쳐버린,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는 환경의 상태
오직 그분과 제가 함께 하는,,,
평안, 더 바랄게 없는 마음의 만족,,,
기도 하는말의 혀가 도저히 쫓아가지 못한는
생각조차도,,,
기도하는 말(소리)도 없는,,,
그런 경험을 여러번 했고
최근에는 교회 예배중에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이게 방언인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전는 신비주의자 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 기도의 응답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
고전 13:1 ]
입니다.
그후에 얻은 응답은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꺄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19]
와 예언을 사모하라는,,,
우리가 이미 예언자 인것을,,,
그의 재림을 믿고
그의 나라가 이루어 짐을 아는,,,
잠시 보이는것을
영원할것 같이 착각하고
실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시간중에서,,,
[오호라 나는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르 건져내랴
롬7:24]
믿음도 은혜로,,,
구원도 은혜로,,,
예언도 은혜로,,,
모두가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과 혼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작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28절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했고,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혼 (이성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그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全能)하나님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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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
2009-08-18 00:42
70.xxx.248
별똥별님 ,
방언에 관한 이 글을 읽어면서...
믿음이 조금씩.. 성장 해 가는 저의 모습 속에..
혹시나, 저에게 교만이 들어 와 있지나 않는지...
신중이 생각하면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곳곳마다...성경을 토대로 하여 주시니 ......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별똥별님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 ....
이 글을 copy 하여 .... 다른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별똥별님, 귀한 글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irene님의 댓글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처럼달처럼
2009-08-20 09:44
71.xxx.242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에 대해 누구가 삐딱선을 타겟어요? 누구나 다 아멘으로 받아야죠....
아침이슬
2009-08-25 02:08
75.xxx.239
많은 교회에서 방언을 참! 많이 추구하고 있더군요.
글쎄요!!!...
주님께서 저에게 방언을 주시면 받겠습니다만.....
그렇게... 원하는 마음이 생기지가 않더군요.
그냥 저는 조용히 ... 주님께 저의 모든 것을
고해 올리렵니다.
저의 방언은 (전도)하는 곳에 사용하렵니다...
방언을 그렇게 처음부터 받아들였구요....
....
별똥별
아침이슬님....
(-저의 방언은 (전도)하는 곳에 사용하렵니다...-)
본 글에 보면,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라는 문장이 있어요.
아침이슬님과 같은 생각이라고 하겠네요.
방언은 모국어를 포함한 세상방언과 성령님의 선물로서
주시는 영의 방언으로 분류할 수 있어요. 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도용의 방언이, 모국어를 지칭하시거나 아니면 주님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을 말씀하시거나, 각종 방언들을
총동원, 전도에 사용되어 질 수만 있다면...가장 아름답고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네요. 초대교회에 첫 방언의 선물이
전도로 사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지요. (행 2: 1-13절)
영으로 방언을 주신 목적도 교회(개인, 회중)의 유익을
8/25 13:46
66.xxx.18
별똥별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유익...최대의 유익은 바로 영혼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 위에 오신 목적도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다만, 전도에 사용되어지는 방언이 모국어냐
아니면 성령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이냐 하는 것인데요.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성령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모국어로 들려졌느냐,
아니면 사도들 포함,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입으로 각 나라
방언을 말했느냐, 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큰 이슈로서 논란이 되고 있구요, 저는 성령의 선물로서 영의 방언을 말했으나, 듣는 이들의 귀를 열어 주셔서 각자가 자기 나라 방언으로 들려졌다고 하는 쪽을 지지하고 있어요, 이것이 사도행전 적인 전도방언 견해라 할 수 있지요
irene
2009-08-17 20:26
141.xxx.181
일반적으로 은사중단론(계시적은사중단론)을 주장한다고 알려진 개혁주의를 추구하시는 신학자나 목사님들 중에서도 방언은사를 당연히 인정하시는 분들로 많습니다.
다만 계시적으로 사용된 정경이 완성되기전의 그러한 역할의 방언과 통역은 없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언은 오늘날도 영의 언어로서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통역도 가능할것입니다
통역은 항상 통역이 다 될수도 없을것이고 항상 통역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것은 그대로 믿습니다
하지만 매사를 직통계시처럼 방언통역이나 예언을 받아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신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미래의 일들을 미리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만일 한두번 미래를 맞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려려 올무가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을 때에는 꿈이나 환상이나 말씀을 통해서나 환경을 통해서나 반드시 가르쳐 주실것입니다
가르쳐 주시지 않는것은 그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으러 다니거나 방언통역을 받으러 가는 행위는 점치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으며 바로 불신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모님의 균형잡힌 글에 공감을 합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말씀으로 믿는자의 표적으로 오늘날도 믿는자는 방언을 다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모든 믿는 사람이 다 뱀을 집어야 하며
독을 마셔도 안죽어야 하면 귀신을 다 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손만 앉으면 다 나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에게 완전히 적용된것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본질적인 의미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수 있고 독이 가득한 세상속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니까요.
한편 새방언이라는 뜻도 거듭난자의 언어로도 해석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도 오순절다락방사건으로 바벨탑사건으로 흩어진 언어에 대하여 회복의 그 방언일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방언의 유무가 신앙성숙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신앙행위의 열심과는 어느정도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면 개인의 기도생활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도 사모님이 인용하셔서 언급한 그내용, 주위에 방언을 많이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을 굳이 비교하자면 은사강조하는 사람들의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과 신앙인격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은사는 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며 각 개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이 지 은사가 목적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방언은사뿐 아니라 많은 은사가 성경에 나와 있고 하나님은 믿는자에게 필요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은사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life라는 기본적인 명제를 생각하면 굳이 방언에 목숨걸 필요도 없고 반대로 방언을 부정적으로 바라봐도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성령의열매
2009-08-17 18:23
24.xxx.127
저는 아직 통역을 하는 방언을 받지
못했기에 방언하는 것을 자제하는편
이었습니다.
하지만 " 성령을 찾아서" 라는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방언하는것을
소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모님의 말씀데로 방언에 대해
올바로 인식을 한다면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뜨거운 임재를
체험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은사를
모두에게 골고루 주셨기에 각자 받은
은사안에서 주님에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것이 주님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열정을 잊지않고 날마다 주님 말씀안에서
하루 하루를 주님을 위해 기쁘게 살며
내 이웃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멘넷 여러분들 모두 주님이 주신 은사안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세워주는 귀한 형제,자매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침이슬
2009-09-01 12:16
75.xxx.76
그 푸른 잎들은 ....생명 수를 끌어 올리고 있는
뿌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일들을 아시고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심을 .....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제 자신에게....
물어 보고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agok
2009-08-18 02:24
24.xxx.132
방언은 언제나 흥미로우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주제로서 그리스도 편지님 지적처럼 득보다 실이 더 많은
논쟁으로 치닫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기왕 이런 주제가
아멘넷에 다시 나왔으니 이번에는 균형잡힌 관점에서
보다 실질적인 유익이 더 많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방언이 하늘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책이 나오더니 곧 그
반대격으로 성경에 나오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그 당시 기존하여 사용되어진 외국어라는 견해를 담은 책이
나와서 방언하는 분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었는데 ...
마침 별똥별님과 아이린님께서 방언을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사의 하나로서 보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방언을 외국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로 보시는
견해를 말씀하시니 저도 두 분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거짓방언도 존재하고 인위적인 방언,거짓방언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은사집회들도 있으니 분별하고 경계해야
하지만 방언은사가 사도시대 이후, 정경완성이후로 중단되었고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도
더불어 경계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방언은사 중단론자나 무용론자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분들과 대동소이한 방언관을 가지고 있으리라 보는데
이 방언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또 문제가 되는 점이
바로 신자의 방언 필수 의무론과 당연 권리론인 것 같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해야한다는 방언 필수 의무는 성경이
신자에게 짐 지워준 의무라고 보지 않고 방언하지 못하면
구원받은 신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보고
있으며 만약 방언이 신자의 의무라면 그런 중요한 신자의
의무가 "다 방언 말하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또는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식으로 쓰여지는 대신 다 방언은사를
받아서 방언을 해야만 한다로 적극 장려되어 나오고 다른
서신서에서도 강조되었으리라 보는 입장입니다.
전에 김삼 목사님께서 "방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기에 저는 그 주장을 신자방언 필수 의무론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여 반론을 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신자의 방언 의무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할 수 있다 라는 신자 방언
당연 가능성 또는 권리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제가 이 방언론에 대해 김삼 목사님의 견해를 이해 못하고
왜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가 의문을 품었을 때에
별똥별님과 잠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별똥별님께서도
방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고 모든 거듭난
신자에게는 방언의 주체가 되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기에
방언을 할 수 있는 잠재능력이 있으니 더디하든
빨리하든 모든 신자들은 그 가능성을 인식하며 살으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별똥별 사모님께서 이번 칼럼에서 방언에 대한 주제를 다루어
주셨으니 좀더 깊게 들어가서 과연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지 ,
신자의 방언 당연 가능성, 잠재성,권리에 대해서도 고견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직도 방언을 못하고 있어서 그런 점들이 궁금합니다.
아침이슬
2009-09-01 12:05
75.xxx.76
가을이 성큼 들어 섰습니다.!!
젊음을 마음껏 자랑이라도 하고 있던 푸른 나무 잎들이
누구한테.... 야단을 맞은 듯이 얼굴을 붉이기 시작
하는 군요.
마음껏 즐기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 언젠가... 소리
없이 다가 올 주님의 그 시간..... 항상 준비하는 자세가
되어 있길.... 저의 자신을 재촉 해 봅니다.
별똥별님 , 귀한 글들로도 (주님의 말씀) 약해저 가는 많은
영혼들을 충전을 시켜 주시길 기도 올립니다.
별똥별
2009-08-18 03:13
66.xxx.18
반갑습니다, 자매 아곡님. ^^*
저, 별똥별에게 방언은사와 통역의 은사도 겸하여 허락해 주신 성령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이것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다른 뜻은 없구요, 방언론을 다루는 것은 알지 못하고 다루는 것이 아니기에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니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
아곡님께서 (요즘 자주..ㅋㅋ, 다른 분, (ks) 김삼 목사님의 존명을 정확히 거론을 하셔서 저도 어쩌는 수 없네요.ㅎㅎ), 저는 김삼 목사님과 방언 문제를 두고 심한 마찰을 빚었고, 그것 때문에 주님께, 오래도록 기도해 오던 중, 어느 날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응답은, 다음 두 가지 단어였습니다. “신생아” 그리고 “ability”란 단어였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주님께서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이 다 성도가 아니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이 아니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이것을 신학상 술어로는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가 거듭난 성도인가? 아니면 성전 마당만 밟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하고, 우리가 거듭나게된 것이 무엇으로 되었는가?하는 것을 알아야하며, 우리 속에 내주(in dwelling)하고 계신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는 주님이 께닫게 해 주신 ‘신생아’ 와 ‘ability’를 생각해 보십시다.
아이가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는 우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태어날 때, 이미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ability’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동안 속에 잠재되어 있는 즉, 우리속에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점차 개발해 나가는 것 뿐이고요. 그러나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들은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를 않고 태어나기에, 다 성장한 후가 아니라,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인간처럼 아름다운 언어들을 습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동물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realized or unrealized ability)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화설’의 허구도 알게 됨)
물론, 이 말 속에는 반드시 거듭난 성도여야만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져야만 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여도 그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in dwelling)이 안 계시다면, 성령님의 속성중 하나인 방언을 할 수 있는 ability가 처음부터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방언은 누구의 선물입니까? 예, 성령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한 번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리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 난 사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속에는 반드시 영적언어를 배울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unrealized ability’ 를 가지고 태어 난 영적 신생아이입니다! 왜요? 만약 인간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이 성령님께로부터라면,(영계에는 천사의 방언도 있고, 사탄의 흉내방언도 있기에,) 그 방언의 주체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예수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으로 보지를 않고(육안으로 알 수가 없기에),'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성도’라는 시각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아직도 저, 별똥별은 김삼 목사님의 주장하시는 모든 부분을 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치유사역 부분’ 문제라든가 '십일조 문제'라든가 여러가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 구원론이 같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절 말씀)” 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힘써"라고 하는 부사는 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지요.
인간의 논리나 판단은 언제나 미숙하지만,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정확무오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unrealized ability’, 라는 단어와 필수(essential, or requirement)단어의 의미도 확실히 구분하고 이해 하게 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이런 사실을 알지 못할 때, 방언은 성도의 필수라 착각하게 되고 그럼에도 자신이 방언을 할 수 없음에 불안해 지고 이런 심리를 이용한 자칭 은사자들이 그들에게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반드시 방언을 해야만 성도라 인정을 받는다고 속일 수 있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우리(성도)의 속에 계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시면, 그분은 각종 은사의 주체십니다. 당연히 내 속에 “unrealized ability"가 있다는 것이구요,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그분의 선하신 시간대 속에, 방언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직 그분의 뜻대로!!!!
agok 그렇다면 "방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라는 견해에는
일단 동의하시는군요.
[이로써, 마가복음 16장17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믿는 자는 반드시 방언을 해야한다.’라고 주장하시는 김삼목사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틀을 깰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깨달음에 의해 방언이 은사의 관문임을 인정하면서 거듭난 신자안의 미처 깨닫지 못한 능력을 언급하시며 이런 주장도 하셨기에 저는 별똥별님이 방언필수론을 긍정한다고
생각했었는데....좀 헷갈리네요.
8/18 05:30
24.xxx.132
agok 제가 예전에는 왜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가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가 김삼 목사님과 별똥별님과의 토론을 통해 그런 가능성을
고려해 보게 되었고 지금은 방언이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라는
견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신자가 은사를 받아 누릴 수 있는 권리인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인가
하는 문제에서 헤매고 있는 상태 , 8/18 05:37
24.xxx.132
별똥별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말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 5- 이하)"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도 신학자들이
수세기를 두고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김삼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별똥별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권면해 드립니다...먼저, 단어 해석이 주는 뜻부터
잘 이해 되도록,
주님께 기도하여 깨달음 얻기를 구하세요.
저는 분명, 김삼 목사님이시라면, 성령님께서 저를 통하여 주신 말씀,
(unrealized ability)의 뜻과 필수(essencial, or requirement)란 단어의 뜻이 같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그리 믿고 있습니다만....
그 차이점을 아곡님께 이해 시켜드릴 능력이 제게는 없는 것 같네요...^^
8/18 12:23
66.xxx.18
별똥별 아, 이 뜻은요,
저는 지금도 김삼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말씀이고요...
그럼에도 김삼 목사님께서는 제가 드리는 말씀으로
약간 수정해 주실 의도는 없으실 것이란 뜻도
내포되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약간만 수정하라고 하시면, 어렵겠지요?
저는 (unrealized ability)의 뜻과 필수(essencial or requirement)
같은 뜻이란 느낌이 들지 않으니까요, 제가 오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삼목사님의 십일조 관도, 저와 아주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근소한 차이가 있지만요, 그 약간이..
이것이, 직접 대화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대변인으로 의의를 제기하는 것과의 차이점일 수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8/18 13:32
66.xxx.18
agok
어쨌든 방언에 대해서 나름대로 설명해 주시려고 이리 답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똥별 사모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짐보
2009-08-20 20:09
204.xxx.179
몇번 댓글을 달려고 하면
분주한 직업적인 일로 미루다 번복되고
다시 글을 읽고 글을 올리려니 어떤 얘길를 할려 했는지
이제 다 잊어버렸습니다. ㅎㅎ
오래전
방언하는걸 구경도 못하던
교회만을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기도원을 간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은
완성도 되지 않었는데,시장통 처럼 북적 거렸습니다.
강단같은 커다란 방에
몇백명이 앉고 누워서
밥도 먹고,성경도 보고,얘기도 하고,,,
여기 저기에서 시도 때도 없이
"랄라 ~쌀라" 하는 방언기도는
제게,신기하기도 했지만 정신을 빼놓기도 했습니다만
이상한 언어(?)에 별 생각을 다 했구요.
저야, "바울같은 믿음"을 달라는 기도제목으로 갔지만
거기에 모인 대부분의 분들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사고로
육체적인 치유를 목적으로 오신 분들도 있고
정신적인 질병 -특히 간질병-으로 치유를 위해
금식기도를 하기위해 지방에서 오신 분들도 많었기에,
그분들의 방언기도를 할때에는
정말 시장통 보다 더 시끄러워
기도도 할 수없고
멍하게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때론 어느분은 방언은사를 받는 다고 토굴속으로 들어가서
밤새 목놓아 통성기도 하시고
어느분은,밤을 새워며 소나무 밑둥을 잡고 기도하며
울고 부르짖으며 '주여! 주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방언을 받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소나무 하나를 뽑아야 방언이 터진다고,,,
그중에 방언못하는 저는 믿음이 약한 부실한 신자였고
그당시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신자도 아니다는 시절,
저도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조용 조용히 하는 방언을 주십시요.
시끄럽지 않은 방언을 주시어서
주위사람 방해하지 않게 하여주십시요]
결론을 방언을 받지도 못했고
소나무도 뽑지 않았구요 ㅎㅎ
어느날은 -영어와 일어를 잘 하는 방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기도 했는데 그것도 못받구여 ㅎㅎ
어느날은 -믿음의 확신-을 위해
예수님을 협박하는 기도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방언을 주시지 않아
제 믿음 은 날날리 믿음이 되었습니다.
제게 뭔가 확신을 주십시요.
이 기도가 끝날때 까지
무엇을 응답하시던가 뭔가를 보여 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믿는 믿음이란
세뇌교육이라 고 판단하겠습니다! ]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떠듬거리며 기도하다
이것 저것 생각나는 성경귀절도 인용하고
제 심정을 하소연 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난 모든 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생각나지 않는 죄도 기억을 되살리려 기도하고,,,
어느듯
기도하는 말이 빨라지고
그 생각을 혀가 쫓아가지 못하고
생각 자체가 기도가 되고,,,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는 순간,
시간마쳐 멈쳐버린,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는 환경의 상태
오직 그분과 제가 함께 하는,,,
평안, 더 바랄게 없는 마음의 만족,,,
기도 하는말의 혀가 도저히 쫓아가지 못한는
생각조차도,,,
기도하는 말(소리)도 없는,,,
그런 경험을 여러번 했고
최근에는 교회 예배중에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이게 방언인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전는 신비주의자 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 기도의 응답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
고전 13:1 ]
입니다.
그후에 얻은 응답은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꺄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19]
와 예언을 사모하라는,,,
우리가 이미 예언자 인것을,,,
그의 재림을 믿고
그의 나라가 이루어 짐을 아는,,,
잠시 보이는것을
영원할것 같이 착각하고
실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시간중에서,,,
[오호라 나는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르 건져내랴
롬7:24]
믿음도 은혜로,,,
구원도 은혜로,,,
예언도 은혜로,,,
모두가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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