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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성경을 넘어서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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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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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학생의 자살 소식을 지난 한 해 동안 네 번씩이나 접해야만 했고, 이번에는 또 ‘카이스트’ 영재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주어야 할 교수님, 학교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던 한 교수님이 아직은 한창 일할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충격스러운 소식이 들려온다.
 
‘카이스트’만의 베르테르효과(모방자살)일 것이라고 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한 가운데, 과학기술 영재의 요람인 카이스트가 영재의 무덤이 되는 것은 아니냐며 걱정하는 소리도 들린다. ‘카이스트’에서 지난 5년간 8명의 학생이 자살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스쳐 지나가거나 너무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자살 이유야 모두 다르겠지만, 공통분모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 공통분모를 찾는 데서 문제 해결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타인이 감히 어찌 그들의 아픔을 가늠할 수 있으랴만, 사회가 그들 앞에 쳐놓은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 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높았던 것은 아닐까? 턱없이 높게, 더 높이, 더 높이를 부르짖는 우리나라의 병든 사회구조를 원망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것도 아니면 그들 스스로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목적,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너무 높게 잡은 탓일 수도 있겠다.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이토록 허망하고 안타까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입장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어떤 것도 아깝디아까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할 만큼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자살은 비겁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고 막아낼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알아내야 하고 막아내야만 한다. 이런 끔찍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대책반이라도 구성해 보았으면 좋으련만, 장래가 촉망되는 우리들의 영재를 지켜내지 못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저미며 파고든다.

그렇다.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따라서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너무 높아서도 안 되고, 너무 낮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식(knowledge)은 벽(wall)과 같은 것, 적당히 높으면 자기 방어에도 도움되고, 바깥세상도 내다볼 수 있어 좋지만, 그 벽이 너무 높으면 역으로 자신이 그 벽 속에 갇혀 버리는 수가 있다. 이처럼 인간이 넘어야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도 마찬가지다. 너무 높은 것도 문제지만,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너무 낮게 잡아 마음대로 넘으려 하는 욕심 또한 문제다. 도덕적 기준선(base line)이 그런 것이다.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에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세상을 시끌시끌 거리게 하는 범죄행위, 파렴치한들의 행태를 잠시 눈여겨보면, 그들은 도덕적 기준선 (基準線(base line))을 자신의 눈높이로 낮게 정하는 것, 때로는 인간 이하의 기준으로 하향조정을 한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유기(遺棄)하는 것, 부모가 어린 자녀를 유기(遺棄)하는 것, 이외에도 얼마나 낯뜨거운 일들이, 밝은 해 아래서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인가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형편없이 낮춘대서 기인한다고 하여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기도 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미시간주 마스힐바이블처치 담임인 롭 벨 목사가 있다. 그는 미국 주류 메가 처치(대형교회) 담임목사다. 그런 그가 최근 '지옥은 없다'고 주장해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천국 지옥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운명에 관한 책(Love wins: A Book About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에서 '지옥은 없고 인간은 죽어서 모두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의 창조주'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수 만든 피조물인 인간들을 지옥으로 보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기독교의 존재 이유이자 신학의 시작점인 내세론을 전면으로 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신학계에서 연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남침례신학교 총장인 보수 신학자 앨버트 몰러 목사는"인간적 교만"이라면서"지옥의 개념을 사람들이 좋아할 방향으로 순화해 결국'다른 복음'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벨 목사의 주장이 '가능한 해석'이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관점을 가진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는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틀리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말했다. 논란은 벨 목사의 책을 단숨에 대박 작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벨 목사는 지난 3일 열린 저자사인회에서 자신이 보편구원론자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논쟁을 부르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왜 수억의 인간을 저주하겠느냐는 단순한 의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지옥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지옥)이 하나님의 불타는 마음일 뿐, 실제성은 없다 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과거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의 주장이 현대 기독교계에서 열풍으로 불어오고 유행병처럼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이긴다.” 라는 아름다운 詩 적 언어로 포장하여 내어 놓은 ‘지옥 부인론’을 책으로 출간해 돈방석에 올라앉은 ‘Rob Bell’ 목사님, 진리를 부인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그 욕심의 근원지는 무엇일까?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록한 말씀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신학자들의 논란이 많지만, (‘핫지’(Hodge), ‘바레트’(Barrett), ‘메이어’(Meyer))등 ‘기록한 말씀’을 가리키는 원어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점에 착안, 여기서도 기록된 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킴이라고 했다. 반면, ‘칼빈’ (Calvin)이나 ‘루터’ (Luther)등의 개혁자와 또는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기록한 말씀’이 4장 이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내용 아니면 1-3장에서 인용된 구약 성경을 뜻하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학자의 주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66권)을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것을 후대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사랑의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계 22: 18-19절 참조) 어쨌거나, 고린도교회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의 진보에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이었고, 이것은 순전히 영적 교만이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책망, 지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고전 4: 8) 여기에서 “왕노릇..” 이란 영적 교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자들의 패역한 교훈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며 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 20-21),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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