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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日常)속에서의 성령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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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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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日常)이란 매일 같은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이란 매일 동일한 평상시의 생활이고 일상적인 일이란 매일 똑같이 하는 일이란 뜻일 것이다.

지난 주 직장에서의 일이다. 필자가 앉아있는 데스크를 지나야 출퇴근 시의 timecard를 swipe 할 수 있기에 다른 department 소속의 사람들도 가끔 지나가고 그래서 얼굴을 볼 때마다 서로 웃으며 인사하곤 한다.

그중의 한 여자분(50대)이 평상시처럼 인사하며 웃는 얼굴로 지나 가던중 멈춰서더니 필자의 웃는 얼굴 모습을 몇 년동안 지켜 보았는데 항상 볼 때마다 평안한 얼굴이라서 자기도 나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며 지나갔다.( 이름도 잘 모르고 기억에 의하면 5년 이상은 일주에 두 번 정도 본 것 같다.)

그 여자분이 지나간 후 기뻤다. 적어도 일상 속에서의 내 얼굴이 평안하게 보여 진다는 것이며 그것은 크리스천의 냄새가 조금은 난다는 뜻이 아닐까하며 생각하던 마음이 컴터 자판을 끌어 당겨 이 글을 쓰게 만든다.

우리의 얼굴이 주일날 교회라는 장소 안에서 교인이라는 관계 속에서 만나 잘 차려입은 양복과 칼라가 어울리는 넥타이와 깨끗한 와이셔츠(왜 이런 호칭이 한국 사람끼리는 붙었는지 약간은 궁금하다)로 단장된 모습 속에서 서로 은혜롭게 악수하며 은혜로운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얼굴 모습과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일상 속에서의 모습이 같아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지 ?

아내의 친구중 한 분은 남편과의 사이가 안좋아 집에서 보다는 교회에서의 예배나 행사가 좋은데 집에만 오면 짜증나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록 교회에서 권사님이고 교우들에게 은혜로운 얼굴로 대하지만 집으로 가면 그 마음이 지옥으로 변한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일까 ?

일상(日常)속에서의 성령(聖靈)충만(充滿)이란 말 그대로 내 속에서 나의 영이 완전히 죽고 없어져 성령만이 가득차서 나의 매일 매일의 일상을 지배하기에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말은 외적인 모습에 치중하여 현대 교회에서는 사람을 장풍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병을 치유하며 방언을 하고(방언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예언을 하는 것을 강조하더니 신사도와 아이합에 이르러는 선지자와 새로운 사도가 등장하여 임파테이션이나 신비주의,혼합주의로 기존 교회의 밋밋한 교인들을 유혹하기에 이르렀고 인터콮은 교인들을 예루살렘 땅을 밟으며 기도하게 강하게 밀어 붙인다.(자기들만 열심있고 자기들만 제대로 선교한다고 강조하여 기존 교회의 교인들을 도맷금으로 평가절하한다.) 정말 신앙생활 제대로 하기 힘든 세상이다.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럽고 복잡해질 때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 무려 3장에 걸쳐 은사론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고린도교회에서도 요지음의 교회와 같이 은사론이 중요하고도 문제가 많았다는 추정이 나온다.

아마 아멘넷의 게시판이 가끔 댓글 토론으로 방언,통역,입신등의 주장에서 열을 내며 자신들만의 영적 권위로 다른 은사들을 부정하기에 논객들 사이에 분열과 반목이 되는 현상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은 모습일게다.

비단 게시판뿐만이 아니라 열광적인 은사주의자들로 인해서 벌어지는 교회의 영적인 분열과 반목은 어찌하여야 할까?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7절)”라는 바울의 일갈과 같이 외적인 모습을 중시하며 성령을 자신이 컨트롤하기 좋아하는 은사주의들을 지양(止揚)하고 그 내면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중시하여야 한다.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또한 바울은 은사의 외적인 형식이나 모습이 아니라 은사의 내적인 내용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은사의 내적인 원천인 성령이 동일한 것을 주목하라고 강조하지 않는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즉 ,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외적인 은사 자체가 아니라 은사의 원천인 성령을 중시하라고 하며 이는 모든 은사가 기능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은사 자체의 높낮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예배 시에 설교나 대표기도나 헌금이나 찬양들이 같은 비중이나 위치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가 교회의 당회장(?)이나 당회원 들이나 교회의 가장 볼 품 없고 힘없는 어떤 교인을 대할 때에 똑같은 모습으로 주를 대하듯 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럴 때만이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이리라.

나의 영이 살아있는 만큼 나의 이해관계의 크기에 따라 사람들을 대할 것이며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대신 교회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그들의 잘못을 외면하며 자신에게 닥쳐올 불이익이 두려워 침묵하는 우리들이 아닐까 ?

나의 영이 살아있는 만큼 세상의 염려 근심이 나를 흔들며 나의 얼굴에서 평안함을 뺏어가기에 항상 기뻐할 수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으며 쉬지않고 기도할 수 없는 우리가 아닌지.

믿음의 세월이 흘러갈수록 남에게 보여지는 외적인 모습에 치중하기 보다는 나의 내면을 직시하며 나의 영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에 의지하는 삶을 살고 싶다.

구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저들이 행군할 때 그들의 중심에 항상 성막이 함께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나 신약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라 고백할 때 내속에 내재하셔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점점 복잡해지는 교계와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의 삶이 구도적인 태도로 살아가야 하며 우리가 각양 은사를 대할때 은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원천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여 내안에서의 성령이 교회안에서 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점점 더 넓고 깊게 나의 삶을 지배하는 매일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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