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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과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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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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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어느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바닷가에서 놀다가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부부는 아이를 찾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기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헤엄을 칠 줄 몰라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이를 본 한 청년이 용감하게 물로 뛰어들어 아이를 건져 안고 나왔습니다. 그 때 아이의 어머니가 “야! 너 모자는 어떻게 했어?”라고 신경질적으로 자기 아이에게 소리쳤습니다. 아이를 물에서 건져낸 청년이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아이 어머니의 너무 의외의 태도와 말에 할 말을 잊었습니다.
자기 아이가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형편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이를 살려준 청년도 주위에 몰려온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먼저 아이의 형편을 살피고 아이의 생명이 위급하다면 은급조치를 취해야 하고 아이가 생명에 지장이 없다면 그 다음 해야 하는 일은 아이를 살려준 청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이고 교양이고 염치이고 사람됨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나 혹은 직장 동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불편합니다. 지혜도 교양도 염치도 예의도 없는 사람을 만나면 참 속상하고 화가 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에게 약간 씩은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상황 파악을 잘 못하고 경망스럽게 처신하여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과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직접 물리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의 어머니처럼 다른 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것도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태도는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대인관계의 문제이고,
둘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그 자신을 불행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물질적 피해보다 더 나쁠 수가 있습니다.

상대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현대인들은 민망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직설적입니다. 옛날 같으면 체면과 염치와 예의 때문에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았을 느낌이나 감정을 현대인들은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런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상대나 어떤 일에 대해 좋지 않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표현한다는 면에서는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솔직하고 거짓말 못하는 현대인의 성품이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못생긴 사람에게“참 못생기셨네요.”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저는 거짓말을 못해요.”라고 한다면 그 정직함과 솔직함은 상대방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폭력이 됩니다.
못생긴 사람에게 잘 생겼다고 하는 것도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 생긴 사람에게 직설적으로 못생겼다고 말 하는 것은 솔직함도 정직함도 아니고 예의 없음이고 무례함입니다. 못 생긴 사람에게는 “키가 크시네요.”라고 하든지, 키도 작다면“피부가 참 고우시네요.”라고 할 수 있고, 그도 아니라면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이 예쁜 북한 여성들은 “참 미인이시네요.”라는 칭찬보다 “골 좋으시네요.”라는 칭찬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머리 좋다는 말을 골 좋다고 합니다. 본래 칭찬은 정직하지 않은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칭찬에도 부풀림과 거짓이 섞이게 마련입니다.
윗사람이나 권력자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부가 되어 나쁘지만 보통 사람들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칭찬에 부풀림과 거짓이 좀 섞인다고 하여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진실이나 정직은 보편 가치입니다. 이 보편 가치에 반대되는 것이 거짓과 왜곡과 비난 같은 것입니다. 진실과 정직이 아무리 중요한 보편 가치라도 그 보편 가치가 지혜와 예의와 교양과 염치를 손상시키게 하면 안 됩니다. 법정 증인은 진실과 정직으로 증언하면 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는 진실과 정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는 일곱인데 사탕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마침 여섯 명은 밖에 나가 놀고 한 명만 집에 있어서 어머니가 그에게 사탕을 주며 “형들이나 동생들에게 사탕 먹었다고 말하지 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거짓말시켰다고 하지 않습니다. 교육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아이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이라 하여 아주 나쁘다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지혜와 예의와 교양과 염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혜와 예의와 교양과 염치는 사랑을 지향하며 실현하는 방법들입니다. 진실과 정직이 사랑을 지향하지 않고 왜곡될 위험을 지혜와 예의와 교양과 염치 같은 것으로 예방하는 것입니다. 도덕이나 윤리도 진실과 정직이 왜곡되는 것을 예방합니다. 이를테면 도덕과 윤리도 진실과 정직이 사랑을 지향하도록 협력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지향하지 않는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이념이나 지식이나 이론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이러한 가치 질서를 알 리가 없습니다. 사회과학이 유용한 학문이지만 무신론자가 이 학문을 이용하면 실패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실 때 언제나 부모의 입장에서 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그 내용이 추상같지만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 주는 생명과 복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대할 때 언제나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율법을 대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적용한 것처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점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하시기도 하고, 친구라고 하시기도 하고, 남편이라고 하시기도 하고, 주인이라고도 하시고, 왕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요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늘 기억하고 상기하게 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실 때 출 20:2-3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대할 때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셨고 내 아이들을 구원하여 주셨고, 내 부모형제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일깨워 상기시키시는 말씀이고 나아가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와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를 일깨우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깨어버린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하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토대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그 사귐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이 기쁨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떤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영지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은 성육신의 역사성을 믿지 않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예수님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신앙으로 고백하지만 영지주의는 성육신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가현설로 실명하고 자유주의는 신화화 시켰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고 환상이나 신화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적으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복음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신자는 신앙생활을 정신적 또는 마음의 수양의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음이나 정신의 수양이 아니라 영적 전투라고 하였고 신자를 영적 군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주어졌다는 설명입니다. 성경은 성육신의 의미를 낮아지심과 희생(빌 2:8), 섬김의 실천(마 20:28), 하나님 사랑의 실현(요 3:16, 13:34, 15:12)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하나님 사랑의 실천을 영적 전투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구속의 희생은 하나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입니다(요 15:13). 복음에 대한 이러한 설명과 가르침을 정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행위는 조용히 참고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싸우는 목적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고 또 같은 성도들과도 사귐을 갖습니다. 그 사귐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토대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귐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높은 위치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사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귐의 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내려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하시는데 방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놀다가 시비가 생겨서 고함이 오가고 드디어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부지깽이를 들고 뛰어 들어와서 뭐라고 혼을 냅니다.
어머니는 우선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잘잘못을 따라 혼을 내고 상황에 따라 말로 혼을 내거나 혹은 부지깽이로 때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교훈은 늘 이렇습니다. 먼저 큰 놈한테 “너는 형이 되가지고 동생하고 싸우면 되겠냐? 언제 철들래? 동생이 뭘 안다고 그걸 상대해서 싸워!”그리고 동생에는 “너는 왜 형 한데 대들고 그러니?. 형은 부모와 같은 거야. 알았어? 다시는 형 한데 대들지 마! 알았어?”어머니는 그렇게 합니다.
정상적인 어머니는 절대로 검사나 판사처럼 안 합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엄마들 중에는 자식들이 싸우면 마치 검사나 판사처럼 판단하고 처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모르면 똑똑한 것이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성육신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사귐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법정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가정을 법정처럼 만들면 안 됩니다. 교회가 법정처럼 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성육신의 원리가 적용되는 곳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식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 가정에는 남편과 아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와 자식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는 목사와 교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를 만나 사귀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나의 가정에 와 계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족들은 그런 의식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토대 위에 세워진 가정에서 짜증 불평 원망 싸움은 안 될 일입니다. 아내를 살려주시고 남편을 살려 주시고 자식을 살려주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불행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은 기쁨과 감격으로 누려야 할 삶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다른 성도들과 사귀면서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쓴 편지가 요한서신입니다. 사귐과 기쁨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예수를 믿어 기쁘고, 성도들과 사귐에서 기쁘고, 허물을 덮어주어 기쁘고, 격려하고 위로해서 기쁘고, 선한 일에 참여하여 기쁘고, 악과 싸워 이겨서 기쁘고, 참는 데 승리하여 기쁘고, 기도할 수 있어 기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쁘고, 도움을 받아 기쁘고, 밥을 먹을 수 있어 기쁘고, 물을 마실 수 있어 기쁘고, 잠을 잘 수 있어 기쁘고, 걸어 다닐 수 있어서 기쁘고, 숨을 쉴 수 있어 기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3-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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