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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윤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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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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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과 같아서 자기 자신을 질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목사에 대한 크레딧이 추락해서 그 누구도 설교자가 설교한대로 실천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교인들 중에 목사는 설교한대로 실천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사실을 잘 못 인식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가르치고 설교한대로 실천하는 설교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가르친 대로 실천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예수님 이외에 가르친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모두는 이 사실을 전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윤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생각하기를 윤리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리를 이야기한다고 하여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전제입니다. 그렇다고 윤리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 행동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설교자가 설교한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처럼 윤리를 이야기 하는 사람도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보편적 전제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한 때 한국에서는 “국민 윤리를 가르치는 유명한 교수는 모두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농담 비슷한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와 윤리”라는 주제의 글을 쓰면서 내가 윤리적이기 때문에 윤리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이렇게 해야 혹 내가 실수를 해도 사람들의 비난이 덜 가혹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비윤리적인 행동을 부담 없이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는 나 자신에게 윤리를 말하고 또한 그것이 일반적 차원에서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윤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나의 지력의 한계 때문에 어려울 것 같아서 실천적인 면에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론적 바탕 없이 실천을 이야기 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개혁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아서 비판하는 게 아니고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성경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상대화 할 수 없는 절대 권위를 갖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실적으로 기독교가 윤리를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시키고 있는 문제들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비판하고 바른 윤리적 원리를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이론적인 것을 아주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아주 기본적인 것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윤리”라는 말의 용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윤리”란 말은 동양에서는 인윤 윤(倫)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윤리라고 합니다. 아마 이것은 유교의 삼강오륜에서 따 온 倫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유교에서 삼강오륜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됨의 표식으로 삼강오륜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삼강은 부위자강(父爲子綱):아들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고, 군위신강(君爲臣綱):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고, 부위부강(夫爲婦綱):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오륜은 군신유의(君臣有義):임금과 신하는 의가 있어야 하고, 부자유친(父子有親):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어야 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 장유유서(長幼有序):어른과 아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고, 붕우유신(朋友有信):벗과 벗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자나 다른 학자들이 윤리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영어의 Ethics라는 말을 번역할 때 오륜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입니다. 삼강오륜은 유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니까 번역이 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오륜에 어긋나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교에서는 까마귀가 효성이 깊은 짐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까마귀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민간에서 사람의 도리를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개 같은 사람이라 혹은 개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비윤리적인 사람을 개 같다고 하여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 23:18)고 하였습니다.

 

20여 년 전에 한국에서 케직 사경회가 열렸을 때 James Voice 목사님이 로마서를 강의하는 중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강사가 사람을 개에게 비유를 했더니 한 분이 일어나서 엄중하게 항의하기를 “사람을 어떻게 개에게 비유하느냐 사과하라”고 하자 그 강사 목사님이 “예, 사과하겠습니다. 정중히 사과하겠습니다. 그런데 사과를 하기는 하는데 개에게 사과합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그 강사의 주장은 개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모독을 느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개가 말을 했다면 “개를 뭐로 보고 더러운 사람에게다 비유를 하느냐?”고 하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이 탈선하고 죄를 범하는데, 정말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동성애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개에게 비유할 때 개가 모독을 느끼게 된다는 해학적 조크입니다.

 

윤리라는 말은 희랍어 에또스(εθος)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 뜻은 habit이나 usage나 또는 custom같은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습관, 버릇, 풍속, 관습 등의 뜻입니다. 이것이 영어로는 ethics로 독일어에서는 Ethik로 번역 된 것입니다. 우리말의 도덕이라고 번역 된 용어로는 영어의 morality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라틴어의 mores라는 단어에서 나왔고 그 뜻도 역시 관습, 풍속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mores에서 moral로, εθος에서 ethics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라고 번역한 ethics나 도덕이라고 번역된 moral이라는 두 용어의 차이가 분명치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론적인 것을 강조할 때는 윤리라고 하고, 실천을 강조할 때는 도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형용사로 윤리적, 혹은 도덕적이라고 쓸 때는 구분 없이 사용합니다. 다만 명사로 사용할 때는 윤리 혹은 도덕이라고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윤리”의 “理”자가 의미하듯이 이론적인 것을 강조할 때는 윤리라고 하고, 실천적인 것을 말할 때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이제 윤리에 대하여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윤리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평가이니까 먼저 인간의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행동은 윤리적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기침이나 눈을 깜박거리는 행동이나 자신을 향하여 날아오는 돌을 피하는 것 등의 행동은 모두 자연적인 행동에 속합니다. 자연적인 행동은 본능에 의해서 하는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의지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윤리적 평가나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릴 때 소를 먹이러 산에 자주 갔었습니다. 한번은 소를 먹이러 가서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소가 남의 논의 벼를 뜯어먹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때 논 주인에게 눈물이 나도록 야단을 맞았습니다. 벼는 소가 뜯어먹었는데 야단은 내가 맞았습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소를 나무에 붙잡아 매 놓고 화가 풀릴 때까지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런데 소는 그 다음에 또 남의 논에 벼를 뜯어먹었습니다. 이번에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남의 벼를 뜯어먹어!” 라고 잔소리를 해가며 소를 때렸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소는 뜯어 먹어도 되는 풀과 뜯어 먹으면 안 되는 곡식을 구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구별을 할 수 없는 소는 기회만 오면 언제든지 남의 곡식을 뜯어 먹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소를 때렸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좀 들어서야 내가 소를 때린 것이 어리석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는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남의 곡식을 뜯어 먹다가 얻어맞아도 그 다음에 또 남의 곡식을 뜯어 먹습니다. 소는 남의 곡식을 뜯어 먹으면서 훔쳐 먹는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냥 거기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먹습니다. 곡식은 뜯어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할 책임은 전적으로 소의 임자에게 있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소를 때린 것을 생각하며 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동물들의 모든 행동은 자연적인 행동에 속합니다. 따라서 동물의 행동에 대해서는 윤리적 평가나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에도 상당한 부분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습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지적 장애인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성인은 잘못인 줄을 알지 못하고 한 행동이라도 그 행동이 법을 어겼다면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모르고 법을 어겨도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법적 제재는 피할 수 없을지라도 윤리적 비난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다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라서 잘못인 줄 모르고 했을지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무엇보다 성경이 무지를 죄라고 하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3-1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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