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악으로 보는 왜곡된 관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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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23-10-1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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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 이야기는 그 당시 포도원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의 이익과 충돌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불편하게 생각하며 악평하는 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이익과 인정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늘 불만입니다.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면 억울하고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못마땅하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을 진심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경향은 단순한 덕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정치와 경제와 문화 일반을 지배하는 원리처럼 작동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인과 집단과 국가의 특징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인류 초기에 사람이 많아서 사회 문제가 복잡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환경을 탓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최초의 살인은 타락한 인간의 영적 그리고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명과 인권과 자유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이러한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강조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락한 인간의 도덕적 수준 때문입니다. 살인이 원한이나 정의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보복이 아니라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시기심 때문이었음을 가인의 살인 사건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데, 그러한 결과에 대한 가인의 반응이 몹시 분하게 여기며 얼굴색이 변하였다고 성경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가인은 그같은 하나님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자기의 제사는 거부되었는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 사실에 대한 대응으로 가인은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가인의 이 살인은 하나님과 아벨에 대한 거부이며 자기 나름의 응징인 셈입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문책하실 때 가인의 반응은 뉘우침이 아니고 잘못한 것이 없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살인을 통해 가인 개인의 죄를 지적할 뿐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적 그리고 도덕적 수준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영적 도덕적 수준은 선과 정의를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과 그 판단에 근거하여 불법과 폭력과 살인까지 정당화하는 것이 인간 문명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일용직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온 가족이 굶어야 하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꾼들이 보지 못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하나님은 보신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닙니다. 자기를 둘러싼 선입견과 자기 폐쇄, 자기 몰입에서 벗어나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후 마 5:45절에서 너무 평범하면서도 우리의 허를 찌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우리는 보통 악하고 불의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그런 오해를 하게 하는 조항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심판은 하나님 통치에서 어두운 부분이고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은 밝은 부분입니다. 심판은 어둠이고 사랑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이 두 부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현실에서는 여전히 비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잣대로 하나님의 심판과 선하심을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악인과 불의한 자까지 감싸 안고 사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연봉을 받는다는 원칙을 현실 역사에서 실현해보려고 했던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인간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악과 불의를 행한 사람은 용서받는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이용해서 더 악해집니다. 인간은 철부지 아이들이 늘 사랑하고 용서하는 부모를 우습게 보고 점점 더 빗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작동원리는 선과 정의에 고맙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도 인간의 그러한 욕망에 지배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원리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전적으로, 온 힘을 다하여 의지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과 불의를 바꾸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바꾸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 관점을 놓치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 원리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미국 교회에 빌딩 임대료를 내고 사용합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가 교회에게 임대료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의 연봉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교회가 교회에게 빌딩 임대료를 받으면 안 된다고 하시거나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의 연봉을 같게 하라고 하시면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와 종일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한 일꾼들처럼 불평할 것입니다.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실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모든 삶을 항상 새롭게 합니다. 즐거울 때만이 아니라 슬플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 수준이 유지되어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 가난해도 행복합니다. 가난한 삶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출중해야만 삶이 즐거운 게 아니라 부족해도 삶은 즐겁습니다. 어떤 외모나 스펙을 가지고 살든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망 있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은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결혼도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하였습니다. 동료 판사들보다 더 빨리 진급도 하였습니다. 연봉이 올라서 큰 집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갔더니 몹쓸 중병이 걸렸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이나 연민이나 동정이나 선행 따위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뒤돌아보며 원망과 자책에 휩싸여 있을 때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병상에 찾아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들의 눈물방울이 자신의 손등에 떨어질 때 그는 빛을 보았습니다. 아내가 불쌍하고 아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에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아내에게 아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러시아 말로 “데리고 나가”라는 말과 “미안해”라는 말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잘나가던 사람은 망해봐야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기할 수도 없이 망하고, 자기에게 충성하던 아랫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친하게 지내던 동료 기업가들도 모두 떠나고, 초호화판 모임도 없어지고, 골프 모임도 못 나가고, 집도 줄여서 이사하고, 겨우 입에 풀칠할 양식으로만 살게 되면 그제야 그 사람의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걸을 때의 중력도 느끼고, 곤충과 야생화가 눈에 보일 것입니다.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떤 조건에서도 우리와 함께합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어떤 선입견으로 인해서, 더 결정적으로는 자기 안에 폐쇄되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나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엘리트 집단에 속했습니다. 어떤 모임에 가든지 그들을 위해 상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입는 옷에는 특별한 장식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죄인이나 세리들과 어울리는 예수라는 인물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십자가에 죽은 자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격이 왜곡되었거나 그들이 위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세계 안에, 즉 율법 패러다임에 갇혔 있었기 때문에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세계 안에 갇히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가 납니다. 세상을 향해 주위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납니다. 분노와 불평과 화가 나를 지배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을까요? 자기 폐쇄에서 빠져나와야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 인생살이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물 안에 있으면 우물 밖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대대로 동굴 안에서 살던 종족은 동굴 안만을 모든 세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습기, 박쥐, 곰팡내, 어둠, 그림자가 그들에게는 현실입니다. 그들 종족에게는 동굴 입구로 나가지 말라는 절대 규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동굴 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와서 자기 종족에게 동굴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는 화형을 당했고, 동굴 안은 이전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목격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먼저 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쪽으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선을 돌려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들리지 않던 말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그런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음과 같은 천사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나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온 땅’은 착한 사람이나 경쟁력이 출중한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장애인도 있고, 가난한 자들도 있고, 실직자들도 있고, 실패한 자들도 있습니다. 질병에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도 온 땅이고, 외로운 곳도 온 땅입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그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런 은총의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우리의 문 앞에서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다른 것에 너무 빠져 있어서 또는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여서 하나님의 은총의 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무너지기 전에 스스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나아가야합니다. 그에게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사는 게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의 선하심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속도는 각자 다르고 깊이는 각자 다르겠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 중에서 작동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이익과 인정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늘 불만입니다.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면 억울하고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못마땅하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을 진심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경향은 단순한 덕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정치와 경제와 문화 일반을 지배하는 원리처럼 작동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인과 집단과 국가의 특징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인류 초기에 사람이 많아서 사회 문제가 복잡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환경을 탓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최초의 살인은 타락한 인간의 영적 그리고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명과 인권과 자유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이러한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강조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락한 인간의 도덕적 수준 때문입니다. 살인이 원한이나 정의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보복이 아니라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시기심 때문이었음을 가인의 살인 사건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데, 그러한 결과에 대한 가인의 반응이 몹시 분하게 여기며 얼굴색이 변하였다고 성경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가인은 그같은 하나님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자기의 제사는 거부되었는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 사실에 대한 대응으로 가인은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가인의 이 살인은 하나님과 아벨에 대한 거부이며 자기 나름의 응징인 셈입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문책하실 때 가인의 반응은 뉘우침이 아니고 잘못한 것이 없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살인을 통해 가인 개인의 죄를 지적할 뿐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적 그리고 도덕적 수준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영적 도덕적 수준은 선과 정의를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과 그 판단에 근거하여 불법과 폭력과 살인까지 정당화하는 것이 인간 문명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일용직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온 가족이 굶어야 하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꾼들이 보지 못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하나님은 보신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닙니다. 자기를 둘러싼 선입견과 자기 폐쇄, 자기 몰입에서 벗어나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후 마 5:45절에서 너무 평범하면서도 우리의 허를 찌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우리는 보통 악하고 불의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그런 오해를 하게 하는 조항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심판은 하나님 통치에서 어두운 부분이고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은 밝은 부분입니다. 심판은 어둠이고 사랑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이 두 부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현실에서는 여전히 비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잣대로 하나님의 심판과 선하심을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악인과 불의한 자까지 감싸 안고 사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연봉을 받는다는 원칙을 현실 역사에서 실현해보려고 했던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인간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악과 불의를 행한 사람은 용서받는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이용해서 더 악해집니다. 인간은 철부지 아이들이 늘 사랑하고 용서하는 부모를 우습게 보고 점점 더 빗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작동원리는 선과 정의에 고맙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도 인간의 그러한 욕망에 지배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원리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전적으로, 온 힘을 다하여 의지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과 불의를 바꾸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바꾸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 관점을 놓치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 원리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미국 교회에 빌딩 임대료를 내고 사용합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가 교회에게 임대료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의 연봉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교회가 교회에게 빌딩 임대료를 받으면 안 된다고 하시거나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의 연봉을 같게 하라고 하시면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와 종일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한 일꾼들처럼 불평할 것입니다.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실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모든 삶을 항상 새롭게 합니다. 즐거울 때만이 아니라 슬플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 수준이 유지되어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 가난해도 행복합니다. 가난한 삶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출중해야만 삶이 즐거운 게 아니라 부족해도 삶은 즐겁습니다. 어떤 외모나 스펙을 가지고 살든 하나님의 선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망 있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은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결혼도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하였습니다. 동료 판사들보다 더 빨리 진급도 하였습니다. 연봉이 올라서 큰 집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갔더니 몹쓸 중병이 걸렸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이나 연민이나 동정이나 선행 따위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뒤돌아보며 원망과 자책에 휩싸여 있을 때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병상에 찾아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들의 눈물방울이 자신의 손등에 떨어질 때 그는 빛을 보았습니다. 아내가 불쌍하고 아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에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아내에게 아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러시아 말로 “데리고 나가”라는 말과 “미안해”라는 말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잘나가던 사람은 망해봐야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기할 수도 없이 망하고, 자기에게 충성하던 아랫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친하게 지내던 동료 기업가들도 모두 떠나고, 초호화판 모임도 없어지고, 골프 모임도 못 나가고, 집도 줄여서 이사하고, 겨우 입에 풀칠할 양식으로만 살게 되면 그제야 그 사람의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걸을 때의 중력도 느끼고, 곤충과 야생화가 눈에 보일 것입니다.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떤 조건에서도 우리와 함께합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어떤 선입견으로 인해서, 더 결정적으로는 자기 안에 폐쇄되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나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엘리트 집단에 속했습니다. 어떤 모임에 가든지 그들을 위해 상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입는 옷에는 특별한 장식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죄인이나 세리들과 어울리는 예수라는 인물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십자가에 죽은 자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격이 왜곡되었거나 그들이 위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세계 안에, 즉 율법 패러다임에 갇혔 있었기 때문에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세계 안에 갇히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가 납니다. 세상을 향해 주위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납니다. 분노와 불평과 화가 나를 지배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을까요? 자기 폐쇄에서 빠져나와야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 인생살이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물 안에 있으면 우물 밖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대대로 동굴 안에서 살던 종족은 동굴 안만을 모든 세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습기, 박쥐, 곰팡내, 어둠, 그림자가 그들에게는 현실입니다. 그들 종족에게는 동굴 입구로 나가지 말라는 절대 규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동굴 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와서 자기 종족에게 동굴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는 화형을 당했고, 동굴 안은 이전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목격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먼저 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쪽으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선을 돌려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들리지 않던 말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그런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음과 같은 천사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나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온 땅’은 착한 사람이나 경쟁력이 출중한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장애인도 있고, 가난한 자들도 있고, 실직자들도 있고, 실패한 자들도 있습니다. 질병에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도 온 땅이고, 외로운 곳도 온 땅입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그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런 은총의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우리의 문 앞에서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다른 것에 너무 빠져 있어서 또는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여서 하나님의 은총의 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무너지기 전에 스스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나아가야합니다. 그에게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사는 게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의 선하심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속도는 각자 다르고 깊이는 각자 다르겠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 중에서 작동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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