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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악에게 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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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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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바울은 로마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우들에게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라는 교훈을 하였습니다. 이런 교훈이 필요한 것은 그들이 로마 사회에서 다반사로 악행을 당하였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게 합니다. 흔히 로마제국을 천년 로마라고 하는데, 이는 로마 제국이 무시무시한 악한 제국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매우 너그러운 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라는 말이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그들이 점령한 나라와 국민에게 과거의 그 어떤 제국보다 너그러웠습니다. 로마제국을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평안을 보장하였습니다. 로마 정부는 로마의 법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받아들인 나라와 민족들에게는 정치와 문화와 심지어 종교까지도 자율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강력한 로마제국의 이러한 정책에 의해 분쟁과 전쟁과 침략과 폭력과 불법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팍스 로마나의 수혜로 안녕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제국이 천년 제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그러한 정책 때문에 바울을 비롯한 초기 복음 전도자들이 전도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팍스 로마나 안에서 평안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 한 분 외에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기독교는 안녕을 보장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온갖 부당한 취급과 모함과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형편 가운데 처한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였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는 “이신칭의”인데,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교리를 감사하게 받고 믿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황당한 말씀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씀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실제로 정의로운 일을 해야 정의롭게 되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정의로워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복음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었고 실제로 경험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열악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가 절대적인 신과 같이 군림하고 다스리는 곳에서 황제가 아닌 다른 존재를 믿고 섬긴다는 사실 만으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 교우들은 로마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는 고관대작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만족한 삶을 살았던 것은 그 열악한 형편에서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스럽게 사는 삶의 비결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박해하는 로마의 통치자들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이 의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예수님을 믿어 의롭게 된 이들을 박해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만, 의롭게 된다고 하여 현실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도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도 갈등과 오해와 모함과 박해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당시 로마에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극단적인 무시와 모함과 소위 마녀사냥을 당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주 후 64년에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 사건입니다. 네로 황제가 고의로 불을 지르고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교회의 기둥 같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바울이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90년대에는 도미티아누스의 황제숭배 정책이 더 노골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짐승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 로마제국에 의한 교회 박해가 극심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네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들의 노골적인 박해가 본격화하기 전인 40~50년대에 이미 바울은 크고 작은 시련을 겪었습니다(고후 11:23). 바울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 나라 원리를 배우게 되었고 성령님은 그러한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롬 12:14절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참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현실에서 온갖 부당한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에 적용해도 말이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큰일 난 듯이 대응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은 참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고 난 다음에 바울은 즐거워하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마음을 높은 데 두지 말고 낮은 데 두며,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삶을 손익계산으로 생각하지 말고 삶 자체에 집중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손익계산으로 대처하는 우리에게 말이 안 되는 교훈이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적절한 말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익계산으로 따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를 찾아다니며 손익계산으로 일일이 따진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모든 것을 손익계산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에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진하면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삶이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악을 못 본 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악에 저항해야 하는 것이 보편 가치입니다. 구약성경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오래전 바벨론 문명에서도‘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원리를 세웠습니다. 이런 원리에 따르면 악은 단호하게 대응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던 시대의 로마는 자기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대상을 가차 없이 응징했습니다. 그런 일에 주저하거나 피하는 것은 로마 정신에 어긋납니다. 로마제국은 로마의 안녕을 해치는 즉 ‘팍스 로마나’에 방해가 되는 대상에게는 일체의 연민도 느끼지 않고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처단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당한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악한 방법으로 응징하는 것이 그 시대를 지배한 정치 원리였습니다. 그런 일을 용감하게 수행한 사람이 영웅으로 추앙되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를 미개한 시대라고 우리는 오해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리는 지금도 작동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인 힘을 갖는 것이 국가의 목적입니다. 힘이 선이라는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보편 진리요 하나님 나라 원리입니다.

선한 일이란 우리 편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악랄한 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는 상황에서 적에게 무조건 선을 베푸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선을 베풀어야 할 대상에는 원수도 제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 사이에 복잡하게 관련된 것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대처해야 할 교훈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햇볕과 비를 주신다는 원리와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도 그 나라 백성들도 하나님처럼 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하는 것은 원수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한 세력을 악한 방법으로 대응하거나 제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입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권면하고 있습니다(신 32:35).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은 악에 대한 사적 앙갚음에 대한 제한을 설정하신 것입니다. ‘이에는 이, 눈에 눈’이라는 말씀도 사실 사적인 앙갚음에 대한 제한입니다. 원수 갚는 일을 개인에게 맡기면 결국에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거나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왈가왈부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뜻일까요? 바울이 이렇게 교훈한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직접 원수 갚는 일이 우리의 영혼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전쟁 영화에서 원수와 적이 쓰러지는 순간에 우리는 통쾌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통쾌함은 순간이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훼손합니다. 미국 군인 중에는 전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미국 군인은 거의 이기는 전쟁에 참여하지만, 트라우마는 승리한 군인에게도 남습니다. 폭력물을 계속 보면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일상에서도 작동합니다. 아무리 예술이나 문화라고 해도 그것이 단순한 흥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책을 읽으며, 어떤 사람과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됩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반드시 그 영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계속 술을 마시는 사람의 정신과 육체 건강이 어떨지 분명한 것과 같습니다. 마리화나가 합법이 된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주도 그 악영향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라는 책에서 인간 문명이 인간을 점점 더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문명 이전의 인간이 무식하고 교양이 없어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일 것 같으나 실제로는 문명인들이 더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인류 역사를 근거로 설명하였습니다. 옛날 전쟁은 직접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싸우기에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전쟁을 인터넷 게임을 하듯이 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크게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 문명 기술에 의해서 마비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작동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악한 사람도 화려하게 잘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죽을 때까지 고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는다는 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은 이러한 현실에서 믿기가 힘듭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떤 구체적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 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이 말씀은 원수 사랑이 원수에게 부끄러움을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악한 자에게 잘해주면 상대는 우습게 보고 더 악랄하게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악의 본질을 통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악의 본질을 통찰하게 되면 나 자신이 원수, 또는 악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악을 척결하려고 나섰는데, 깨닫고 보니 나 자신이 바로 악이었다면, 또는 원수에게 있던 그 악이 나에게도 똑같이 있다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악의 뿌리가 아주 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싶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폭로합니다. 가인은 아벨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악한 행위의 배경에, 또는 그 심층에 사탄이 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악과 죄가 인간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악을 척결한다는 말이 얼마나 경솔한 일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악을 행할 수도 있으니 선과 악을 구별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판단할 때는 판단하고, 저항할 때는 저항하고, 시위에 나설 때는 나서야 합니다. 그건 각자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 판단과 선택이 사실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 있으라고 경고합니다. 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라도 정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나쁜 놈 되지 말고 착한 사람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착한 일과 악한 일을 동시에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냉정하고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자신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교양 있는 척하면서도 교만합니다. 개혁적이면서도 사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선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선으로 이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우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악과 대결할 수 있습니다. 그 악은 다른 이에게도 있고, 나 자신에게도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악이고 위선이고 원수인지 헷갈릴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듯이 악이 정복되었습니다. 현재 남은 악은 적의 패잔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악을 만나서 내가 이기고 정복할 수 없다고 하여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으로 악일 이기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 2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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