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 인생 자각의 은혜
페이지 정보
황상하ㆍ2023-09-23관련링크
본문
어머니가 80을 넘기시면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금 죽어도 아무도 너무 일찍 죽었다고는 안 한다.” 살 만큼 살았고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인생의 절정기를 지나 남은 시간은 덤이라 여기는 어머니의 여유가 부러웠습니다. 나도 이제 남은 시간은 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야 할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젊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라고 할까, 남은 시간은 덤이고 부스러기라는 인식에 어렴풋이 라도 눈 뜨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돈도 명예도 부스러기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직 욕심이 젊어서 거기까진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모두가 충분한 자기 몫을 취하기 위해서 뛰고 달리고 몸부림칩니다. 좀 더 높이 오르고 좀 더 많이 움켜잡고 좀 더 건강하게 좀 더 오래 살려고 온갖 것을 좆아, 분주하게 삽니다. 그런데 그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부스러기 인생관은 수도사들의 인생관입니다. 우리가 수도사도 아닌데 치열한 현실에서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이상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나 아내나 자녀들이 남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만 먹고 살게 될까 봐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현실에서 서로 제 몫을 챙기려고 애를 쓰고 머리를 굴립니다. 사실 어찌 보면 그게 인생 사는 것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치를 거슬러서 살기는 힘이 든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흐름에 편승하여 사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실 내게 부스러기만 돌아온다면 처량하고 비참하게 느껴 져서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원리는 우리가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줄 모르면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더 좋은 음식, 더 자극적인 영화나 드라마, 더 짜릿하고 신나는 일만을 추구한다면 더 중요한 것을 잃게 됩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음식만을 즐기지 말고 먹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존재의 기쁨 위에 음식도 문화도 취미도 귀한 것이지 존재의 기쁨을 모르는 자에게는 아무리 아름답고 감미롭고 비싸고 화려하고 멋있는 것이라도 곧 식상해지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열악한 환경인 광야에서 최소한의 먹을거리인 만나로 생명의 충만을 경험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고관대작들은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남이 남긴 부스러기로 만족할 수 있다면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천국 부자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서 부스러기로 만족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행복감보다는 불행감을 더 많이 느끼며 살고, 패배감에 함몰되거나 불평불만에 사로잡혀 허우적댈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비교의식으로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가난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허우적거리며 삽니다. 오늘날은 이런 심리가 점점 확산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어 반사회적인 돌출 사태가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현실적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는데 뭐든지 나눠 가지는 것이 공평이라고 생각하는 철학과 사조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들은 권력과 돈과 심지어 지식까지도 나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거의 필연적으로 가진 자를 증오하고 물리적으로라도 공평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그릇된 공평의 가치 앞에 부모와 자녀의 도리와 스승과 학생의 예절과 남녀의 구별까지도 철폐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뜻대로 안 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이렇게 무너지고 민주주의 종주국인 미국이 이렇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성공신화를 일상화하려는 욕구가 대한민국처럼 강한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한 이방 여자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생하던 중에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 기적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세상에 밝히 나타내실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을 때 복음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차별 없이 전파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그러한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여인의 믿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믿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본을 제시하는데 머물지 않고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그들의 외식과 교만과 불신 때문에 빼앗기게 될 상황과 비교되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태가 가나안 여인이라고 하는 이 여인은 마가복음에서는 희랍사람으로 수로보니게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외국인을 희랍사람이라고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바울의 기록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언급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을 경멸조로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사람의 유전과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종교적 형식과 인간적 전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주어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더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막 7:24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신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라고 한 것을 보아 유대인들을 피하고 싶어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언급한 이 상황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에 오셨을 때 드러내지 않고 잠시 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보이시면서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제안하셨지만, 언약의 상속자요, 특별한 그의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눈멀고 귀가 막혀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아무 관련이 없고 아브라함의 언약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약속의 언약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던 것을 보아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귀동냥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 여인은 율법에 대하여 누구보다 전문적 지식을 받아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배척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메시야를 찾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온 직접적인 동기는 딸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딸은 흉악한 귀신이 들렸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의학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정신병과 귀신 들린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신병과 귀신 들린 것은 일단 진단이 어려워서 치료도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문제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해결 자체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이방 여인은 이런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녀는 예수님께 오기 전에 딸의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병적으로 꺼리는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홀대를 예상했지만, 딸의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여러 번에 걸쳐 이 여인의 호소를 무시하고 거절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 들려서 고생합니다.”라고 하는 데 듣고도 못 들은 척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무슨 조치라도 좀 취해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노골적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당신의 소명이고 이방 여자의 요구에 일일이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도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들었는지,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 앞에 바짝 다가와 절하면서‘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며 매달렸습니다. 이 여인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고, ‘나를 도우소서.’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절박한 상황인지라 체면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태도를 보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웬만하면 남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굽실대거나 불쌍히 여겨달라거나 도와달라고 읍소하는 일이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길을 가다가 이 여인이 예수님께 굽신대고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이 여인을 차별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면 화가 치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가나안 여인의 비굴한 태도에도 화를 냈을지 모릅니다. 속도 없는 여자라고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 굽신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야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씀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아마도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비난 댓글이 폭주했을 것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개 취급했다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변명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비판하실 때도 강한 표현을 사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위선자들이라고도 하셨고,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하셨고, 자기를 죽이려던 헤롯 왕을 여우라고도 하셨고, 아주 심할 때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게 집단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에게 이렇게 심한 인격적 모욕이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평소의 예수님의 태도와 너무나도 다릅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모독적인 말을 들은 이 여인의 태도입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보통의 경우 누구라도 마음을 닫게 마련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모욕을 당하면 미련을 버리고 발길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놀라지만, 이 여인의 발언에 더욱 놀라게 됩니다. 나는 이 발언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낍니다.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발언을 일반적 기준으로 평가하면, 예수님의 발언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는데 이 여인의 발언은 그 구별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인간의 혈통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로 취급당하면서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냐고 하였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저는 통념을 깨뜨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희열을 느낍니다. 진리를 믿고 따르는 자라면 모름지기 통념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영혼과 마음이 청결하지 않고는 보일 수 없는 태도입니다. 부스러기 인생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엄청난 반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나고 무게 있는 말씀인지는 이 사건의 배경인 마 15:1~20절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종교 엘리트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하여 영적인 시각장애인이라고 비판하신 바로 다음 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 여인을 그들보다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추상같은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이 여인에 대한 칭찬을 읽으면 이 가나안 여인을 향한 예수의 칭찬이 얼마나 엄청난 무게와 권위를 지닌 말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남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로 고픈 배를 채우는 불쌍하고 고달픈 인생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대의 엘리트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 탁월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델로 우뚝 세워 우리의 본보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하여는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라고 하셨고 부스러기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이방 여인에 대하여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마 15:14, 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세상을 둘러보면 모두가 충분한 자기 몫을 취하기 위해서 뛰고 달리고 몸부림칩니다. 좀 더 높이 오르고 좀 더 많이 움켜잡고 좀 더 건강하게 좀 더 오래 살려고 온갖 것을 좆아, 분주하게 삽니다. 그런데 그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부스러기 인생관은 수도사들의 인생관입니다. 우리가 수도사도 아닌데 치열한 현실에서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이상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나 아내나 자녀들이 남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만 먹고 살게 될까 봐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현실에서 서로 제 몫을 챙기려고 애를 쓰고 머리를 굴립니다. 사실 어찌 보면 그게 인생 사는 것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치를 거슬러서 살기는 힘이 든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흐름에 편승하여 사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실 내게 부스러기만 돌아온다면 처량하고 비참하게 느껴 져서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원리는 우리가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줄 모르면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더 좋은 음식, 더 자극적인 영화나 드라마, 더 짜릿하고 신나는 일만을 추구한다면 더 중요한 것을 잃게 됩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음식만을 즐기지 말고 먹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존재의 기쁨 위에 음식도 문화도 취미도 귀한 것이지 존재의 기쁨을 모르는 자에게는 아무리 아름답고 감미롭고 비싸고 화려하고 멋있는 것이라도 곧 식상해지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열악한 환경인 광야에서 최소한의 먹을거리인 만나로 생명의 충만을 경험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고관대작들은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남이 남긴 부스러기로 만족할 수 있다면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천국 부자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서 부스러기로 만족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행복감보다는 불행감을 더 많이 느끼며 살고, 패배감에 함몰되거나 불평불만에 사로잡혀 허우적댈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비교의식으로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가난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허우적거리며 삽니다. 오늘날은 이런 심리가 점점 확산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어 반사회적인 돌출 사태가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현실적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는데 뭐든지 나눠 가지는 것이 공평이라고 생각하는 철학과 사조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들은 권력과 돈과 심지어 지식까지도 나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거의 필연적으로 가진 자를 증오하고 물리적으로라도 공평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그릇된 공평의 가치 앞에 부모와 자녀의 도리와 스승과 학생의 예절과 남녀의 구별까지도 철폐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뜻대로 안 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이렇게 무너지고 민주주의 종주국인 미국이 이렇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성공신화를 일상화하려는 욕구가 대한민국처럼 강한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한 이방 여자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생하던 중에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 기적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세상에 밝히 나타내실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을 때 복음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차별 없이 전파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그러한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여인의 믿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믿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본을 제시하는데 머물지 않고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그들의 외식과 교만과 불신 때문에 빼앗기게 될 상황과 비교되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태가 가나안 여인이라고 하는 이 여인은 마가복음에서는 희랍사람으로 수로보니게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외국인을 희랍사람이라고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바울의 기록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언급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을 경멸조로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사람의 유전과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종교적 형식과 인간적 전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주어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더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막 7:24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신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라고 한 것을 보아 유대인들을 피하고 싶어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언급한 이 상황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에 오셨을 때 드러내지 않고 잠시 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보이시면서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제안하셨지만, 언약의 상속자요, 특별한 그의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눈멀고 귀가 막혀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아무 관련이 없고 아브라함의 언약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약속의 언약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던 것을 보아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귀동냥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 여인은 율법에 대하여 누구보다 전문적 지식을 받아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배척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메시야를 찾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온 직접적인 동기는 딸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딸은 흉악한 귀신이 들렸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의학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정신병과 귀신 들린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신병과 귀신 들린 것은 일단 진단이 어려워서 치료도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문제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해결 자체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이방 여인은 이런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녀는 예수님께 오기 전에 딸의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병적으로 꺼리는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홀대를 예상했지만, 딸의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여러 번에 걸쳐 이 여인의 호소를 무시하고 거절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 들려서 고생합니다.”라고 하는 데 듣고도 못 들은 척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무슨 조치라도 좀 취해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노골적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당신의 소명이고 이방 여자의 요구에 일일이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도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들었는지,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 앞에 바짝 다가와 절하면서‘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며 매달렸습니다. 이 여인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고, ‘나를 도우소서.’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절박한 상황인지라 체면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태도를 보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웬만하면 남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굽실대거나 불쌍히 여겨달라거나 도와달라고 읍소하는 일이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길을 가다가 이 여인이 예수님께 굽신대고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이 여인을 차별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면 화가 치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가나안 여인의 비굴한 태도에도 화를 냈을지 모릅니다. 속도 없는 여자라고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 굽신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야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씀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아마도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비난 댓글이 폭주했을 것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개 취급했다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변명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비판하실 때도 강한 표현을 사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위선자들이라고도 하셨고,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하셨고, 자기를 죽이려던 헤롯 왕을 여우라고도 하셨고, 아주 심할 때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게 집단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에게 이렇게 심한 인격적 모욕이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평소의 예수님의 태도와 너무나도 다릅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모독적인 말을 들은 이 여인의 태도입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보통의 경우 누구라도 마음을 닫게 마련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모욕을 당하면 미련을 버리고 발길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놀라지만, 이 여인의 발언에 더욱 놀라게 됩니다. 나는 이 발언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낍니다.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발언을 일반적 기준으로 평가하면, 예수님의 발언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는데 이 여인의 발언은 그 구별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인간의 혈통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로 취급당하면서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냐고 하였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저는 통념을 깨뜨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희열을 느낍니다. 진리를 믿고 따르는 자라면 모름지기 통념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영혼과 마음이 청결하지 않고는 보일 수 없는 태도입니다. 부스러기 인생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엄청난 반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나고 무게 있는 말씀인지는 이 사건의 배경인 마 15:1~20절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종교 엘리트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하여 영적인 시각장애인이라고 비판하신 바로 다음 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 여인을 그들보다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추상같은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이 여인에 대한 칭찬을 읽으면 이 가나안 여인을 향한 예수의 칭찬이 얼마나 엄청난 무게와 권위를 지닌 말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남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로 고픈 배를 채우는 불쌍하고 고달픈 인생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대의 엘리트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 탁월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델로 우뚝 세워 우리의 본보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하여는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라고 하셨고 부스러기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이방 여인에 대하여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마 15:14, 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