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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 데우스 베레 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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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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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며 신비입니다. 한국 기독교인 중에는 예수님을 신으로만 생각하거나 신성을 더 우위에 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부활과 승천 장면에 이르면 예수님은 완전히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계시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옳고 당연하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믿고 강조하는 이들 중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어도 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면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를 믿는 믿음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그분의 인성을 더 철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자주 붙여지고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그 외에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보여주는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교리로 확정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VERE DEUS, VERE HOMO’(베레 데우스, 베레 호모), 즉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는 교리입니다.

예수님은 희랍 신화에 종종 등장하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아닙니다. 신성에 인성이 덧붙여진 것도 아닙니다.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인간이십니다. 인간은 우선 시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뉴욕에 있으면서 동시에 애틀랜타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성관계를 통해서 쾌락을 느끼고 후손을 남깁니다. 사고로 다치면 걷지 못하고 즐거운 일을 만나면 즐거워하고, 안타까운 일을 만나면 힘들어합니다. 이게 인간이며, 예수님도 그런 생물학적 메커니즘 방식의 제한을 받으며 사셨습니다.

기원후 451년에 칼케돈 교회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레 데우스, 베레 호모(vere Deus, vere homo), 즉 한 위격에 두 본성을 지닌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라고 선언하게 된 이유는 당시 교회 안에 단성론이라는 이단이 성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교회 안에는 몇몇 이단이 있었지만, 가장 심각한 이단은 단성론 이단(the Monophysite heresy)이었습니다. 단성론자(monophysite)라는 용어에는 접두사와 어근이 있는데 접두사 ‘mono’는 “하나”를 의미하고 어근인 ‘phusis’는 “본성(nature)”으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모노푸시스(monophusis) 또는 모노퍼사이트(monophysite)는 단순히 “하나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단성론자들(Monophysites)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하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 본성은 완전한 신성도, 완전한 인성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보는 방식에 따라 신격화된 인성이거나 인성화된 신성입니다. 이 이단이 교회에 심각한 폐해를 끼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진정한 인성을 부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가 “베레 데우스, 베레 호모”교리를 선언한 이후 정통 교회는 지금까지 그 교리를 존중하며 지켜오고 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의 예수님 양성 연합에 대한 설명은, 성경은 성육신 안에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인성인 육신을 취하셨을 때, 그 인성을 신격화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님의 두 본성을 확증하였고, 그 두 본성이 혼동되거나 섞이거나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연합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단성론자들이 했던 것처럼 신성과 인성을 함께 섞거나 육체를 신격화하거나 영을 인간화하면 안 됩니다. 동시에 신성과 인성을 결코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신성과 인성은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연합되어 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님의“각각의 본성은 그 자체의 속성을 유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육신에서 성자는 자신의 어떤 속성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신성은 여전히 영원하고, 무한하고, 전지하고, 편재하고, 전능하십니다. 신적 본성은 신성에 속한 모든 속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인성을 입으셨을 때 하나님이심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인성은 유한하고 제한적이며, 한 장소 외의 다른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없고 지식과 능력이 제한된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셨습니다. 인성의 이런 모든 속성은 예수님의 인성의 속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의는 인간 이성의 기본적인 이해를 넘어섭니다. 신성과 인성의 온갖 혼합을 상상했던 희랍인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여서 한 위격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희랍인들이 가장 권위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수학의 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학에 밝았던 희랍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희랍인뿐만이 아니라 인간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강조하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베레 데우스 베레 호모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을 왜곡하게 되면 죄인을 위한 대속의 사역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신성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른 대속은 참 인간이라야 성립될 수 있습니다.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신 것이 인간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지만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양편을 중재하려면 참 하나님이어야 하고 참사람이어야 합니다. 헬라어 원어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라는 문장 뒤에 세 단어가 접속사나 형용사나 동사 없이 나란히 나옵니다. 중재자의 정체성을 그 세 단어로 규정한 것입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ἄνθρωπος Χριστὸς Ἰησοῦς)라고 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는 사람이며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단어 ‘안트로포스’는 사람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과 똑같이 한 분으로서 중재자인 그분은 ‘사람’입니다. 가장 뒤에 나오는 단어인 예수는 자연인으로서의 이름입니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이 문장의 핵심은 예수님은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반은 신(神)이거나 유별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베레 호모라는 단어가 강조하는 뜻이 그런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 인성의 본질에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베레 호모가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가 우리처럼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할 모든 어려움을 똑같이 감당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외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세 가지 유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돌로 빵을 만들 것,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것, 마귀에게 절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이라면 유혹받을 필요가 없고 유혹이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도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마음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그는 베레 호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욕망이 있다는 사실과 성적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으나 넘어가지 않았듯이 성적인 유혹에도 넘어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고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을 받는 것이며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 때 우리는 의롭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죄의 노예 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새 생명의 상태로 살 수 있습니다. 의와 거룩함과 구속은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 주시는 큰 선물이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세상은 그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한 사람을 죽여서 온 민족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조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어리석고 무력하게 보이는 십자가로 인간 구원의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일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또한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달리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을 갖춘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능력은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없고 오직 성령님께서 나타내 주실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을 가리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교훈은 큰 비밀이고, 사람으로서는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경건의 비밀이 계시가 되었기 때문에, 경건의 비밀은 공부를 많이 하여 학문이 깊은 사람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바르게 깨닫는 자에게 알려지는 신비로운 복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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