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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세속적 율법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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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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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나는 13세기의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포도주와 석류나무 꽃그늘 아래 사랑을 속삭이는 여인들이 있다./ 그대 만일 오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 만일 온다면 이 모두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시가 하박국 3:17,18절과 시편 23편 말씀과 오버랩(overlap)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기에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르고 안전합니다. 하지만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자연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학문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드러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다윗은“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시를 읽으면 나의 마음은 하박국 선지자와 다윗의 고백으로 향하게 됩니다. 자연을 관찰하거나 인문학을 공부하거나 시를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일상에서 마음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향하여 집중 할 때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에 의미가 살아나고 모든 것이 없어도 부족을 못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그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고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을 대적하거나 고발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상에서 일용할 양식만으로 은총의 삶을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를 유혹하거나 위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와 값비싼 선물과 금은보화로도 그런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거나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미국인 사업가가 멕시코의 작은 바닷가 마을로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배를 타고 들어오는 멕시코인 어부 한 명을 만나 말을 걸었습니다.

"이것들을 잡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많이 안 걸렸습니다."

"그럼 더 많이 잡을 수도 있었겠군요. 더 많이 잡으면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뭐, 가족들 먹을 정도랑 친구들 나눠줄 정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럼 남는 시간에는 뭐 하십니까?"

"낮잠 좀 자고,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아내와도 놀고, 뭐 그러지요. 저녁에는 마을을 어슬렁거리다 친구들 만나면 포도주도 한잔하고, 기타도 치고, 뭐 그러고 보냅니다."

이 말을 듣자 미국인 사업가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를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출신입니다. MBA를 가지고 있지요. 제가 아저씨를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아저씨가 잡은 물고기를 소비자에게 직접 팔수도 있고 나중에 통조림 공장을 열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아저씨는 생산에서 가공,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손에 넣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멕시코 전 지역은 물론 전 세계로 수출도 할 수 있지요."

"음... 그렇게 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한 10년에서 15년 정도면 됩니다."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미국인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주식을 상장하고 주식을 팔아 엄청난 부자가 되는 거죠. 수백만 달러를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겁니다."

"수백만 달러? 수백만 달러를 갖게 되면 그다음에는 뭘 하지요?"

"그다음에는 은퇴해서 당신이 좋아하는 바닷가 근처에 근사한 집을 지은 다음 쉬고 낮잠 좀 자고, 아이들과도 놀아주고, 아내와도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마을을 어슬렁거리다 친구들 만나면 포도주도 한잔하고,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뭐 그러고 보내는 거죠."

그러자 이 맥시코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미국인을 쳐다보면서

"지금 내가 그러고 있잖소!"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만끽하는 사람은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비참하게 느낍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고 해서 당장 세상의 모든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외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며, 아쉽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두렵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약속받은 것이지 삶이 이미 완전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언약이고 약속입니다. 구원이 약속이고 언약이긴 하지만 실현된 약속이고 언약입니다. 이 약속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삶을 향해서 수행하듯이 나아가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라는 명제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전심전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시간이 갈수록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골프를 배우는 사람이 점점 골프에 빠져들어 가듯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그 약속의 세계 심층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맛을 보았기 때문에 점점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바울의 진술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려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그는 전문 법조인입니다. 그는 순전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킬수록 인간의 무능력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문제를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런 문제의식은 단순히 종교적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삶의 정수입니다.

현대인들은 대개 일종의 세속적인 율법주의자로 삽니다. 세속적 율법주의란 수학적 계산으로 삶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재산 권력 인기 존경 등에서 남보다 높은 점수를 따야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라프 상의 높은 점수를 따도 실제 삶은 여전히 피폐한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세속적 율법주의는 고액 연봉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이 삶의 기준이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액 연봉이 삶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받는 연봉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체 국민의 상위 1%에 해당하는 고액 연봉을 받아도 그것으로 삶이 행복으로 충만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매달릴수록 내면은 더 피폐해질 뿐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인간의 영적 실존적 한계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찾은 것입니다.

율법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 하는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경험하느냐 하는 관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를테면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느냐 하는 것으로부터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닫는 단계로 나간 것과 같습니다. 공부를 못하거나 얼굴이 못생겼거나 심지어 게을러도 부모님이 변함없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조금 다른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율법에 의해서 자기의 한계를 발견하고 실망에 빠져 살다가 그러한 자신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난님의 사랑에 의한 보장으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기를 대적할 수 없다고, 고발하지 못한다고, 정죄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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