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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가정의 독점적 이상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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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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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성경은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행하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매개로 하여 그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일상에 관한 교훈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마찬가지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특별히 저절로 생겨 난 민족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탄생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전통적인 관습과 역사를 좇아 나라를 세우고 법을 세우고 도덕과 윤리와 질서를 세워왔지만,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하나님께서 일일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의 역사를 따라 살뿐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간섭과 지도와 인도를 받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일상적인 실제 생활에 일일이 성경의 지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나라의 법이 있기 때문에 어느 국민이나 자기 나라의 법을 따르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그 모든 법을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습니다. 나의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서 손해를 입혔을 때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 지계표(地界表)에 대한 관리,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고의로 죽였을 때,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때, 아내가 바람을 피웠을 때, 가난한 사람의 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에 관한 규정도 주셨고, 옷을 만들어 입는 방법, 밭에 씨를 뿌리는 방법, 추수에 대한 것, 손님 대접에 관한 것, 그리고 하나님께 물질을 바치는 것에 관한 법, 구제하는 법 등 수많은 법과 구례와 교훈들이 주어졌습니다. 구약 성경이 이렇게 실제적인 삶에 대해 말씀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신앙이 실제적인 삶에서 구체화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먹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등, 일상적인 모든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지침과 교훈들은 부부를 중심으로 부모와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 관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믿음의 가정들이 그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가훈으로 삼았습니다. 엡 6:1-4절은 초대교회 가정들의 신앙의 가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엡 5:21-6:9절까지인데, 그 가훈의 내용이 세 가지 관계에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과 아내(5:21-33)이고, 둘째는 부모와 자녀(6:1-4)이며, 셋째는 주인과 종(6:5-9)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에 관한 가훈의 원본은 골로새 3:18-4: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나 골로새서가 다 같이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종에 관한 교훈은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가정에 종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훈에 종에 관한 것도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 당시와 오늘날은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그것이 제시하는 원리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적절하게 해석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가훈과 같은 교훈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가훈들 모두는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먼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종이 주인에게 순종할 것을 명령하고 그다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주인이 종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명령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구약 성경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나 사회윤리나 전통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소홀히 다루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효를 으뜸가는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십계명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것이 그중의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부모공경을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으로 믿었습니다. 부모공경을 그만큼 중요하게 다룬 것입니다.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공경도 십계명에서 온 것인데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공경은 이방 종교나 세상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과 근본과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모공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쉽게 일반화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일반화하면 그 참뜻을 놓치게 됩니다. 십계명을 따르는 유대교적인 전통에서 부모공경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유대인의 문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아비에 대한 자녀의 의무는 어떤 것인가?”라고 묻고 그 대답은 “아비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입을 것과 덮을 것을 주며, 아비를 들고 나게 하고, 아비의 얼굴과 손과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자녀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입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부모가 돌보고, 부모가 나이 들면 자식이 돌보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부모공경은 부모 자녀가 서로 간에 생존을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것이나 기력이 쇠약한 부모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움직이도록 하는 일은 한 가정이나 사회가 생존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입니다. 요즘은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가족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모에 대한 몹시 나쁜 풍속도 있었습니다. 고구려 때에는 아직 죽지 않은 노인들을 고려장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몽고의 일부 유목민들에게는

그런 전통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한곳에 정착하여 살지 않고 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 생활에서 걷기도 힘든 노인을 모시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동이 힘든 노인들을 일정한 장소에 음식과 함께 남겨 두었다가 몇 달 후에 와서 죽었으면 장사 지내고, 살았으면 다시 먹을 것을 주는 관습입니다. 생존을 위해 선택하게 된 불가피한 전통이라고 하지만 좋은 전통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곳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노인들에 대한 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습니다. 늙어 병든 노인을 가족들이 집에서는 감당하기 어렵고 또 의료 혜택이나 재활을 위한 physical therapy도 집에서는 제대로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라에서 그런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에 엄청난 재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모를 자녀들이 집에서 돌보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의 잣대로 생각하면 부모를 널싱홈이나 재활센터에 맡기는 것은 불효입니다. 하지만 옛날에 병든 노인이나 장애인을 집에서 가족이 돌볼 때가 지금 널싱홈이나 재활센터에서 돌보는 것보다 나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집에서는 전문 기관에서 하는 전문적인 케어를 할 수 없습니다. 단정적으로 어떤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제도와 기관들은 인간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그런 대안들입니다. 더 나은 대안이 있으면 또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서 부모공경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오늘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합니다.

바울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대교적인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 )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유대교적 부모공경이 ‘주 안에서’와 ‘순종’이라는 특징으로 변화됩니다. 공경과 순종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용하는 ‘순종’이라는 개념은 단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나머지 두 가지 관계, 즉 부부 사이의 관계나 주인과 종의 관계에도 가장 기본적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가정을 구성하는 모든 인간관계의 초석이 바로 순종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순종은 일반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자가 하는 것으로 자연적인 질서이지만 그것이 곧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하는 순종이 단지 수직적인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종들도 역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녀들도 역시 주 안에서(엔 퀴리오)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지녀야 할 태도를 단지 그리스 철학적인 차원의 휴머니즘이나 유대교적 차원의 율법에 머물지 않고 전혀 새로운 차원인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주 안에서”라고 한 말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가훈도 교회와의 관계에서 주어지고 있지만 넓게 보면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부부관계나 부모 자식 관계나 주인과 종의 관계는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교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또는 주를 따르듯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다음에 나오는 부모들에게 주는 바울의 가르침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부모의 책임 문제입니다. 그 내용은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두 가지입니다. 소극적인 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모들이 하기 쉬운 실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는 부모 앞에서 거의 무방비의 상태이기 때문에 부모에 의해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 의한 상처는 일반적으로 말이나 신체적인 폭력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어떤 점에서는 부모의 지나친 집착 때문에 일어날 때도 많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양육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이 시행착오로 자녀를 양육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나의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객관적인 기준도 없고 최선을 선택할 판단 능력도 부족한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자녀가 문제를 일으킬 때 사사건건 간섭하고 잔소리를 해야 할지 모른 척하고 지나가야 할지, 말로 잘 타일러야 하는지, 또는 눈물이 나도록 따끔하게 훈계해야 하는지, 또는 매를 들어야 할는지 아무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 교육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때로는 확신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불완전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방법상의 부족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도 자기감정과 욕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우선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먼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자세로는 부모의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적극적인 부분을 명령합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은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라고 하였고 루터는 “주님을 향한 교훈과 훈계로 키우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역시 개역개정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훈(παιδείᾳ)과 훈계(νουθεσίᾳ)로 키우라고 하였습니다. 파이데이아는 discipline, training(훈련)이라는 뜻이며, 누테시아는 instruction, warning(지시, 경고)라는 뜻인데, 어떤 학자들은 전자는 매를 드는 교육이고, 후자는 말로 하는 교육이라고 구분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주”(κυρίου)에 있습니다. 주의 가르침으로 자녀들을 키우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서 지녀야 할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한계를 정확하게 진단하였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이렇게 소극적인 데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적극성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자기 성격대로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자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만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교훈과 훈계가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훈과 훈계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훨씬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부모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고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훈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관계와 일반적 윤리 규범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삶의 근거를 하나님 나라의 질서 위에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교훈과 질서가 가정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친구 관계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참된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 위에서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며 세워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뿐인 가정은 세속적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종교적 열광주의에 빠져서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으로만 삶의 의미를 고착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가정도 상당히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나 미지근한 태도로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훈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는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 확신에 의하지 않고 시각장애인 개울 건너듯이 더듬거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남편과 아내가, 형제와 자매들은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합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이 어떻든지, 건강 상태가 어떻든지, 교육 정도가 어떻든지, 가족이 많든지 적든지, 심지어 사이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함께 참여한 자들입니다. 그 큰 질서와 원리 아래서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가 있고, 효도가 있고, 자녀 교육이 있고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그 원리 아래서 직장과 비즈니스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기독교인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지배하는 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정이고 행복한 가정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주님의 교훈과 하나님 나라 원리 위에 든든히 서게 되고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주인과 종이 나아가서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가정의 독점적 이상이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복으로 실현되기를 구가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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