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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가정의 독점적 이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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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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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천지 창조와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묵상해 보면 국가의 이상은 교회이고 교회의 이상은 가정이고 가정의 이상은 우리의 몸이고 몸의 이상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달리 표현하면 국가를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 가정을 내 몸처럼 내 몸을 하나님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국가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나 개인의 문제가 어떤 문제이든지 이러한 구조와 상호 관련 가운데 해답이 있고 해결책이 들어있습니다. 타락한 인간과 그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이 하나님 나라이고 교회인데, 사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원리는 타락 전의 인간 존재와 거룩한 혼인 제도를 통해 세우신 가정과 가족관계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가족의 첫 구성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한 남자와 한 여자입니다. 혼인의 제도는 미완성의 인간 존재를 완성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지만, 인간은 남자만으로는 좋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는 혼인을 통해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혼인을 통해 인간 존재가 비로소 다른 창조물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상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할만한 가정의 구성원이 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 원리와 교회의 원리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러한 가정의 가족 구성원은 단순한 혈연적 관계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든 가족은 혈연적 관계 안에서 모든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하지만 또한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 하나님 가족의 특징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가족들이 하나님 가족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국가와 사회와 교회와 개인의 모든 문제에 바르게 대처하는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 안에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교인이 있다면 먼저 나 자신이 모든 교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교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 원리는 모든 인간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일반은총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문제에 빠져 있는 경우 그 문제에 대한 성경의 진단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족 중에 용납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족을 내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접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영적 실제입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가정과 우리 몸이 정상이 아닌 경우입니다. 교회의 이상이 가정이고 가정의 이상이 우리 몸인데 문제는 가정이나 몸이 정상이 아니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깨어진 가정이나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개인은 문제 해결을 위한 이상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이혼은 깨어진 가정이고 마약이나 알콜 중독은 깨어진 몸(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혼하지 않아도 깨어진 가정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콜 중독이 아니라도 몸과 인격을 망가뜨리는 중독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정을 회복해야 하고 개인의 가치관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결코 지나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교우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가족을 내 몸처럼 생각하라고 합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공부하면 누구나 이러한 가르침을 충분히 유추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정과 가족관계가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성경에 야고보라는 이름이 여러 명 나옵니다. 세베데의 아들이고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가 있습니다. 알페오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는데 바로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초대교회에서 존경받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세 사람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마리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초대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이라고 표현될 만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야고보서 1장1절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하였습니다. '종'이라는 표현은 직분보다는 신분을 나타내는 말로써 야고보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야고보가 주께 예속되었음을 강조한다기보다는 그의 신분의 자랑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 좇아서 사는 것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교회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동생인 야고보에게 쏠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리움과 존경이 마리아와 야고보에 관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리아와 야고보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그 모든 것을 마리아와 야고보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마리아와 야고보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야고보는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이라는 혈연적 신분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신앙적 수준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자신이 예수님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극도로 자제하였습니다.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에서 그러한 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혈연적 신분을 드러내거나 암시하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종 된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처음부터 형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확실하게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혈연적 관계를 통해 더욱 돈독해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는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혈연적 관계가 믿음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렇게 존경받는 마리아와 야고보도 예수님을 처음부터 바로 알고 잘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2년 되던 해에 예수님께 대한 비난과 악평이 노골화 되고 고조되었습니다. 그 악평은 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통해 나타나서 백성들에게 확산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들에게서 나오는 평가를 사람들은 그대로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 악평은 예수님이 귀신들렸고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의 마음마저 흔들어 놓았고 불안을 느낀 가족이 예수님을 데려가기 위해 찾아가기까지 하였습니다(막 3:20-22). 심지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비아냥거리는 투로 이야기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7:2-5).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마지막 만찬에 참석했었는데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시라”고 하실 때 야고보가 그 말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전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야고보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특이하게도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독대한 것입니다(고전 15:4-7).

역시 전설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받아먹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야고보가 울면서 회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그가 어떤 일을 통해 새사람이 된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러 이야기를 지어내었던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후부터 참으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감독이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30여 년 동안 충성을 다하여 교회를 섬기다가 바리새인들의 가혹한 핍박을 받고 순교합니다. 바리새인들과 그를 핍박하는 이들이 야고보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성전 아래로 밀쳐버렸습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에게 사람들이 돌을 던졌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야고보는 예수님처럼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과묵한 사람이었고, 검소했으며,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약대 무릎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믿는 바를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그를 존경했던 것입니다. 그가 믿는 바를 철저히 실천했다는 것은 야고보서가 잘 말해줍니다. 야고보서는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전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는 겸손하면서 높은 영적 권위로 명령합니다. 야고보서 전체는 5장 108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54절이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있습니다. 설명을 길게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명령합니다. 또한, 비유를 많이 사용합니다. 이 모두는 히브리적인 특징들입니다.

무엇보다 야고보는 바울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복음서와 비슷한 구절이 스물일곱 곳이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야고보서에는 ‘예수’의 이름이 단 두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형님이기 때문에 혈연적 관계를 배제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려 때문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형님이라는 혈연적 관계가 강조되면 자신이 예수님의 명예에 무임승차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조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 서두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과는 사뭇 뉘앙스가 다릅니다. 사람들은 가까운 관계일수록 장점보다는 약점을 많이 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너무 가까우면 뛰어나고 귀한 점을 못 봅니다. 주님께서 직접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약점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잘못 본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고 보는 사람의 한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까이서 볼수록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이 태도가 곧 믿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어서 식상해졌다면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100년 믿어도 날마다 새롭고 놀라운 것은 초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형님이기 때문에 믿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혈연적 관계를 극복하는 수준과 단계에까지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형님으로 생각하였을 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형님이기 이전에 주인으로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해하고 믿고 그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막 3:33-35).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혈연관계에 우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누이 그것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시면서 보라 네 어머니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여러 형제가 있었지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의 새로운 개념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혈연적 관계를 극복하는 믿음이란 믿은 안에서 모두를 가족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한 가지 원리만 굳게 붙들어도 야고보처럼 교회의 기둥같은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 1: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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