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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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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인 수가 많은 대형교회일수록 목회자나 성도들이 예배당을 성전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배당이라는 호칭보다 성전이라는 호칭이 더 거룩하고 영적으로 위엄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회중들은 예배당보다는 성전을 더 거룩하고 경건한 호칭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도 예배당을 성전으로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교회 건물인 예배당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바른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적으로나 헬라어 표현에서 ‘신성이 거주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광야 시대의 성전은 곧 ‘성막’이였고 가나안 입성 후는 ‘성소’로 표현되었고 이방 종교와 연관되어서는 ‘산당’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이 모두는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하는 곳으로서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오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장소의 성전은 임마누엘인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기 때문에 더는 어느 지정된 특정 장소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엡4;12, 15), ‘이스라엘 나라’(엡2:12),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엡2:21-22)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소적 의미가 아닌 주로 영적인 의미가 있는 명칭들로서 하나님의 동재(同在)와 임재를 나타내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영적 인격적 관계를 표현하는 명칭입니다.

따라서 제단, 성소, 회막 등은 구약적 명칭이고 신약 시대에 교회가 모이는 장소는 교회당이나 예배당으로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부르는 것이나 교회로 부르는 것은 교회의 참 의미를 오해하게 하고 왜곡하는 결과를 만듭니다. 교회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교인들은 무의식적으로 교회가 마치 장소나 건물로 인식하게 됩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지체된 하나님의 백성들로 조직된 영적 기구이고, 그 교회공동체가 예배하고 교제하는 건물을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또한, 교회 건물에 ‘OO교회’라는 간판에는 정확하게 ‘OO교회 예배당’이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건물은 교회가 예배만 하는 곳이 아니고 친교와 여러 활동을 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일상언어 생활에서 교회와 예배당은 같은 것이 아님을 인식하여 “예배당에 모였다”, “예배당에 간다”, “우리 교회 예배당”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른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목회자와 성도들은 교회당을 자기 집보다 더 아끼고 돌보는 전통이 있습니다. 신실한 장로님이나 집사님이나 권사님은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자기의 집이나 논밭이나 가축보다 교회당이 괜찮은지를 먼저 달려가 살펴볼 정도로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등 집회 때만 사용하는 교회당을 늘 쓸고 닦고 가꾸었습니다. 예배하는 공적 장소이기 때문에 위생적으로 청결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늘 청결하게 유지했고, 청소할 때 여자는 강단에 올라갈 수 없어서 강단만은 남자 성도가 올라가 청소를 하였습니다. 여자는 그 존재 자체가 거룩한 물건이나 장소에 접촉하는 것만으로 신성을 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구약에도 없는 사상입니다. 구약에서 여자 제사장은 없지만, 여자 사사도 있고 선지자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남녀의 구별은 거룩성이나 인격적 수준이나 능력에 따른 구별이 아니라 역할과 질서를 위한 구별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그 존재 자체가 더 성결하거나 거룩하다는 그 어떤 성경적 근거도 없습니다. 구약의 남녀 역할과 질서를 위한 구별이 능력과 수준의 구별로 바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영향 때문입니다. 구약의 용어나 제도는 거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폐하여졌거나 성취되었지만 신약 시대인 오늘에 굳이 구약적인 용어나 규례나 예를 따르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높이기 위함이기보다는 인간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의 율법이나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계시 이해의 역량이 안 될 때 사람들은 제도나 상징이나 형식에 집착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들이 형식이나 외형에 천착하지 않는 것은 참 진리와 생명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얻게 된 영적 생명의 가치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수도자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 생명을 소유하게 되자 최소한의 의식주를 통해서도 영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순수한 사상가나 예술가들도 그들이 추구하는 깊은 경지를 경험하게 되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하나님 경험은 자기축소를 지향하게 되고 나아가서 자기 부인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본을 보이시고 따르라고 하셨던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철저하게 실천했던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축소 지향적으로 살다가 자기 부정의 결과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야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목회자나 성도라면 율법적이고 이교적이고 세속적인 전통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참 경건과 참 생명을 지향하는 특징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가치관이 불신자들과 달라야 합니다. 다른 가치관은 가장 먼저 다른 언어로 드러납니다. 교회 건물을 성전으로 부르는 것이나, 예배당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나, 예배하는 것을 제단을 쌓는다고 하거나,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도에서 축복해 달라고 하는 표현이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기독교 문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합당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결코 영적 권위를 세울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고 왜곡할 뿐입니다.

한 여자가 두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하나님 나라의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청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6)라고 하셨습니다.

칼빈은 이 구절이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은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도 이런 유혹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려하신 대로 초대 고린도교회 안에 계급이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찬과 애찬이 구별 없었는데 있는 자들이 애찬을 나눌 때 있는 자들끼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성찬을 행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계급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습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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