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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해야 할 일로 근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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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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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주인공 이반이 알렉세이에게 들려주는 극시 '대심문관'이 등장합니다. ‘대심문관’은 도스토옙스키의 종교와 신에 대한 관념을 집대성한 걸작입니다. 이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단 심문이 한창이던 15세기 에스파냐 세비야에 예수가 강림합니다. 예수는 1,500년 전 자신이 팔레스타인 땅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을 때와 같은 복장,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가 재림한 메시아인줄 알고 그에게로 나아옵니다. 그때 마침 이단 심문을 위해 내려온 대심문관이 예수가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대신문관은 즉각 친위대에게 예수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게 합니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가 갇힌 지하 감옥에 들어가 예수와 독대하여 얘기를 나눕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공생애 초기 광야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요구하는 악마의 유혹을 모두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택하였지만, 이 세상에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 신비, 권위가 있어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자유보다는 빵을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빵보다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빵에 대한 욕구로부터 자유 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믿음과 질서를 가질 기회를 박탈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를 유혹한 악마와 손을 잡고 지상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빵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가 제시한 신앙의 자유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빵과 신비와 기적을 제공함으로써 나름의 질서를 세워왔는데 인제 와서 예수가 재림하여 자유니 사랑이니 라고 하여 질서를 흐트러트린다면 교회는 무너지고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기에 대심문관은 예수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합니다. 대심문관 자신도 한때 누구보다 신실한 목회자였지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자기 뜻을 전합니다. 대심문관의 모든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예수는 대심문관의 말이 끝난 후 그에게 가볍게 키스를 합니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를 풀어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대심문관의 주장은 예수 당신이 없어도 교회는 잘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가 없어야 교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부흥하고 잘 돌아가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개입하면 교회는 무너지고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세운 교회는 진짜 예수가 등장하면 망합니다. 따라서 그런 교회는 진짜 예수가 등장하거나 참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며 염려합니다.

요한복음 20:1-18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에 대한 최초의 사건 기록입니다.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돌아가시고 사흘 후인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몇몇 여자들이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에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갔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께 대한 마음이 특별했다고 하더라도 날이 밝기도 전에 무덤에 묻힌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아주 복잡하게 정치와 종교와 배신과 실망과 좌절이 뒤엉킨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있었고, 로마 관리들의 정치적인 계략이 있었고, 제자인 유다의 배신이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백성들의 배신까지 이어진 사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까지 예수님의 입장과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고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어서 많은 백성이 따랐기 때문에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지만, 정치와 종교가 권력과 모함으로 예수님을 옭아매어 여지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위대한 랍비, 많은 사람이 구원의 메시야라고 기대했지만 너무나 허무하고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정치권과 종교 권력자들이 일사불란하게 그 일을 처리하였으니까 예루살렘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고 그 충격 또한 엄청났을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불법이고 부당한 일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일이 부당하다고 데모를 하거나 촛불 시위를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당시는 언론도 없었겠지만 아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까지 죽였으니까 그에게 연루된 자들은 완전히 기가 죽었을 테고,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몸조심하고 말조심해야만 하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사실 그런 위험을 피해 엠마오로 내려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한곳에 모여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찾아간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가 먼저 무덤에 찾아갔어야 했을 텐데, 그들은 숨어 있는데 이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누가 더 용감했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모두 절망과 두려움과 자책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뒷수습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모든 것은 끝났으니 각자 흩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론과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대처하자고 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한 말씀에 나름대로 대비를 하였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가고 부활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못 훔쳐 가도록 경비를 철저하게 하였습니다(마 27:62-66).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소위 시체 도난 사건이 발생할 것에 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 28:11~15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합니다. 이것이 소위 시체 도난설입니다.

그런데 정작 부활할 것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어야 할 이들은 아무런 대책도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께서 혹시 부활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라도 했다면 빈 무덤을 기대하면서 무덤으로 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부활을 기대하고 갔다면 시체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실망과 낙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 옮겨 져 있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고 걱정하고 근심하였습니다. 부활을 기대하고 갔다면 빈 무덤을 보는 순간 “할렐루야!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고 소리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 근심했습니다. 그들은 기뻐해야 할 이유로 근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새옹지마의 이야기에서 새용은 기뻐해야 할 이유로 평생을 근심하며 살았습니다. 세옹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겪는 이야기라고 하여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당장 눈앞에서 일어난 일로 근심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 욥, 요셉, 다윗, 선지자들 같은 믿음의 사람들도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였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근심할 이유가 기뻐할 이유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견디기 힘들고 참기 어려운 이유가 기뻐해야 할 이유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은 언제나 우리가 근심하게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엘리야라든가 선지자 중의 한 분이라든가 혹은 세례 요한이라면 큰 문제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메시야는 세상의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까지 상대화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가 선지자라는 것이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메시야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나름대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의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각 분야는 나름대로 전문가적 권위와 쌓아온 업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무리 탁월한 인물이 나온다고 해도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분야를 다 섭렵하거나 아우를 수는 없습니다. 정치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고,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도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아무리 잘 다루어도 배관이나 용접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라도 경제나 정치나 컴퓨터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다릅니다. 메시야는 그 모든 분야를 초월합니다. 모든 분야 권위자들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절대 권위자가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는 인간사의 얽히고설킨 모든 문제를 단번에 풀어내고 평정할 초월적 지도자입니다. 그런 메시야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그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하면 일대 개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이 맞닥트려야 할 상황은 혁명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개혁도 혁명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정치적 개혁도 경제 개혁도 그 어떤 개혁도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여인들이 근심한 것은 예수님이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근심과 걱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기뻐해야 할 이유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면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기득권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참 메시야와 참 복음을 배척하기도 하지만 순수한 참 신앙의 길에서도 기뻐해야 할 이유로 근심하는 존재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눅 24: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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