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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역사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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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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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Edward Hallet Carr)는“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내 첫 번째 답은, 역사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끝나지 않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사실’은 역사가가 의미를 두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다른 수천만 명이 이탈리아 북쪽의 이 조그만 강을 건넌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역사가들은 그들의 시대와 사회의 문제의식의 관점에서 과거를 봅니다. 근대 역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독일의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는 “역사란 인간에 대한 우리 지식의 총체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역사 인식의 객관성을 중요시했습니다. 사가는 그가 다루는 역사적 현상 가운데 어느 쪽 편도 들지 말아야 하며 인종적, 정치적, 종교적, 세계관적 편견 없이 과거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임박한 사회적 변혁을 역사적으로 유추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고 사회적 잉여가치를 획득하고, 정치기구를 지배하고, 기본적인 법질서와 가치 질서를 결정하는 데 우위를 차지하려는 투쟁에 주목했습니다. 자본주의 타파를 위한 혁명을 예고한 그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변신과 발전을 자극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세기 말 부르주아 엘리트의 배경을 지닌 사회학의 창시자 막스 베버는 마르크스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중국과 인도의 종교, 고대 유대교와 달리 청교도적 윤리만이 근대 자본주의 형성에 필수적인 경제 신념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그는 직업노동의 결실로 얻은 부는 신의 축복이라는 신념을 확산시켰습니다. 20세기 초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중국의 초기 기술과 과학적 성취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전하며 유럽 중심주의 사관에 도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숙련된 주철 생산에서 서양을 거의 1500년 앞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이 현대 과학 문명에서 서양에 뒤지게 된 것은 합리적 사고의 결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1928년 태어난 미국의 나탈리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는 역사학과 인류학을 접목하고 미시사와 거시사를 넘나들었습니다. 그녀의 인기작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16세기 피레네산맥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결혼 사기를 다뤘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두고 집을 떠난 남자가 8년 뒤 슬며시 돌아왔는데 그는 남편을 꼭 닮은 가짜였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로 그 시대를 그려냈습니다.

역사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뛰어난 역사학자들의 통찰력의 몇 가지 편린만 얻을 수 있어도 혼탁한 사조의 탁류를 거스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역사학(Historiography)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활동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하고 연구함으로써 과거의 사료를 검증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진실 규명을 추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고 어떻게 쓰여 있는지, 곧 역사적 기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을 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학도가 역사학을 연구할 때 과거의 사건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역사가의 작품 속 사건들의 변동하는 해석을 연구하는 것이 역사학의 주된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집중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티에리 메이상(Thierry Meyssan)은 9.11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사기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펜타곤에는 비행기가 충돌하지 않았다는 가정에서 시작하여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 공작원이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습니다. 6.25를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 아닌 북침이라고 주장하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의 건국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곳 미국에도 미국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을 흔들었던 ‘러시아 게이트’는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 측과 러시아가 공모하여 선거에 개입했다는 것인데 이미 로버트 뮬러 특검팀이 지난 2019년 5월에 수사결과 아무런 관련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린 사건입니다. 그 후 뮬러 특검이 물러나고 존 더럼 특별 검사팀이 그 사건을 맡아 지금까지 조사한 것은 누구에 의해서 그 거짓 러시아 게이트가 만들어졌는지를 밝히는 것인데, 조사 결과의 일부가 보고되어 언론에 공개된 바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가 연루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러시아 게이트로 대통령을 탄핵하려고 할 때는 민주당과 주류 언론들과 심지어 일부 공화당 의원들까지 합세하여 집요하게 대통령을 탄핵하려고 했었는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가 그 사건에 관계하였다는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주류 언론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러시아와 공모 했다는 가짜 게이트를 만들기 위해 백악관을 해킹한 것은 세기적인 범죄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언론이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혐의를 받는 당사자인 힐러리는 법무부 특별검사팀이 음모론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국민을 얕보고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러시아 게이트의 경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그것을 사실로 믿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에서 20세기는 특별한 의미와 계기가 되는 세기입니다. 19세기에 학문으로 세워진 역사학은 18세기 계몽주의와 실증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계몽주의와 실증주의가 역사학에 끼친 영향은 역사 회의주의를 낳은 것입니다. 역사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으려면 당대 자연과학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대 자연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실제로 검증되는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역사학에서도 실제로 확인된 자료에 바탕을 두는 객관적 역사 설명만을 참된 역사 설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교회와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신약신학에서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역사의 순수한 예수를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역사적 예수' 탐구가 그것입니다. 계몽주의와 실증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신학적으로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 대신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갈릴리에서 활동했던 역사적 예수를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작업에서 해석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독일 관념론에서 시작하여 20세기에 해석학, 실존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학문 방법론에 따르면,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즉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맨눈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학의 변화는 교회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는 대상은 이미 우리의 선입견이나 해석이 들어가 있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안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봅니다. 따라서 실제로 있는 세계가 안경을 통해 보는 세계와 똑같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안경 색이 붉으면 세상은 모두 붉게 보일 것이고, 안경 색이 파랗다면 세상은 온통 파랗게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론적 역사관은 기존의 실증주의 역사관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이러한 역사학의 변화가 신학에 영향을 미쳐서 역사적 예수를 찾던 작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관념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그러한 작업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도들과 초대 교회 공동체가 이해한 예수를 왜곡된 예수로 여겼던 19세기 신학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를테면 해석은 이제 왜곡을 뜻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신학에 또 다른 도전을 주었는데,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 어떤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가 하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가 생겼습니다. 관념론적 역사가들, 특히 실존주의 역사가들은 이 문제를 쉽게 피해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역사의 주관성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역사적 예수는 인식 대상이 될 수 없고, 그저 각 시대의 정황에 따라 해석된 예수들만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들 가운데 어떤 예수가 참된 예수냐는 물음에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의 역사성은 괄호 안에 넣어두고 그저 복음의 현재성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선포되는 메시지인 케리그마만을 중시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복음이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는 우리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복음이 지금 이곳에서(here and now)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물음 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되면, 소위 정통과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사라집니다. 더 나아가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더라도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예배 참여자들에게 같은 존재인지는 확실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이는 교회 공동체를 약화할 매우 심각한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증주의 역사관과 관념론적 역사관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권위인 계시가 아닌 모든 이념과 사상은 나름의 장단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단점은 버리고 장점들을 유용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계시에는 복음의 역사성과 현재성 모두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역사적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역사에 근거를 두지 않는 복음은 신화에 불과할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역사적이라 해도, 그 말씀과 행적은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에는 사건에 대한 해석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순수한 역사와 해석된 역사를 모두 역사 속에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말씀하시고 또한,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뿐만이 아니라 사건과 함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주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 어떤 해석이 옳은 해석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한 사건과 일치하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한 사건과 그 사건이 놓여 있는 전체 맥락, 또는 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해석과 역사 가운데서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것과 일치하는 데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해 당신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부활의 역사성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수의를 벗고 일어나시는 장면을 목격하는 데 있지 않고, 부활의 사건과 하나님께서 그 부활에 대해 해석해 주신 의미를 모두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나 설교하는 목사는 본문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과 사건의 문맥, 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 등을 정확히 읽어 내는 능력을 쌓아야 합니다.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설교자들은 감성적 은혜에 집착하기 때문에 사건의 역사와 문맥과 그 본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을 무시합니다. 성경 어느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을 개혁주의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은혜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과 설교자의 감성에 맞는 해석을 본문에 억지로 집어넣는 설교가 은혜로운 설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 계시는 역사의 토대에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역사가 있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과거를 존중하지 않는 현재의 해석은 기독교가 아니라 해석자가 만들어 낸 종교에 불과합니다. 계시와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설명과 역사를 통한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하나님 나라 백성 모두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며 힘써야 하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능력입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신 4:3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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