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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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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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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행복 추구는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법이나 비 윤리적인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데 특히 약한 자들을 불안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인종차별이 불법이거나 합법이거나를 막론하고 차별을 당하는 쪽은 불행합니다. 그렇다고 불법을 행하거나 인종차별을 하는 이들도 행복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은 자연법이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연법을 어기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켜서 행복할 수 있는 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복하게 되는 비결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가운데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로 위해야 한다는 인간적 패러다임의 고정관념에 갇혀 있습니다. 철학이나 그 어떤 학문적 이론이나 사상도 이 고정관념의 벽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 자체가 이성을 상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서 자신을 절대화 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진정한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 패러다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는 결국 계시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신명기 10: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3절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모든 도"를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지만, 그 완전한 계시를 이해하는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같은 하나님의 계시 말씀에 대한 이해도 각기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존재의 두 가지 목적, 즉 천상의 목적과 지상의 목적이 있다고 전제하고 성경과 신학은 하늘의 목적을 깨닫도록 하지만 철학은 지상의 목적을 이해하게 한다고 이해하고 그 둘 사이에 균형을 추구하였습니다.

성경도 지상의 문제에 관한 관심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타락 후에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은 선하다(마 6:33)고 하였으며, 예수님도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물질적 필요에 관심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33). 그러나 아퀴나스는 좀 다른 맥락에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즉 특별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인간 이성은 영생이 아닌 현세적 행복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루터교나 로마 가톨릭은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아퀴나스의 사유의 기저에 놓인 자연과 은총 사이의 큰 구분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 구별이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신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개혁주의는 인간 사유를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아퀴나스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으로 보고 종합하여 균형을 얻으려 하였지만, 전통적인 개혁주의는 은총에 우위성을 부여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개혁주의의 금언 "은총이 자연을 폐기하지 않고 자연을 완전하게한다."는 표현은 보다 성경적인 방향성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철학의 토대는 소위 자율적 이성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가 성경이라는 안경 없이 자연계시를 올바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충하고 그를 교정하여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다른 토대 위에 세웁니다. 바울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의 토대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하나님)께 복종하는 토대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자연과 은총 사이에 그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봅니다. 구원의 은혜는 단순히 타락한 인간 삶에 추가적으로 무엇을 첨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타락한 인간 삶을 마음에서 회복시켜 전 인격이 밖으로 작동하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주된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원론적이 아니라 단일적입니다. 인간의 목적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지상의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보존하시고 또한, 당신의 자녀들이 즐거이 누리는 데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십니다(마 6 : 32-33). 그러나 그분의 자녀인 우리의 목적은 즐기기 위한 것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마 633). 이런 신앙은 수도자적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는 전인적인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은 어떻게 관련을 맺으며 또한 일치성을 이룰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소요리 문답은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인간 존재의 목적이 단일적임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일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와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를 두 개의 일로 구분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그의 현존을 인간 존재에게 보이 실 때 드러나는 커다란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인 이 빛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인 어떤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과 승리와 위엄 등으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대상 29:11).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공유합니다(요 17 : 5). 성경은 이런 의미에서의 영광을 신적 임재의 주권적 속성과 동등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든지 심지어 그가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조차 영광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 자신과 이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는 것과 인간들 사이에서의 명성과 인간이 그분에게 돌리는 찬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전체에 임재하십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시 19:1)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이미지인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특별한 영광입니다(시 8:5; 고전 11:7).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의 사실이고 하나의 규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영광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그분에게 반영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 자체를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반영합니다. 다른 의미에서 그런 영광을 반영하는 것은 우리가 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신중한 선택사항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찬양이나 예배라는 지극히 좁은 범위로 이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학문활동 등의 포괄적 인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고민과 선택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는 입에 담기만 해도 세속적이고 경건하지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를 이해하지 못한 유치하거나 왜곡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심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햇볕이 비추는 창조의 모든 영역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오늘도 지극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쏟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같은 계시 이해와 믿음의 토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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