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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17-미국에서의 우생학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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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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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우생학이 나타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인종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부터 이미 미국에는 흑인이 많았고 19세기 이후에 동, 남부 유럽인과 중국인, 일본인등의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영국에서 이주해 온 앵글로색슨족이었으며, 이들은 다른 인종의 수가 많아지자 서서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각하며 그들을 배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흑인은 물론 중국, 일본인 등의 황인종, 그리고 백인이지만 앵글로 색슨족이 아닌 폴란드, 이탈리아, 그리스인 등은 자신들과 다른 문화와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정신박약, 범죄, 매춘, 알코올 중독등이 미국 사회 내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종 문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종주의적 우생학이 나타났으며, 1900년대 루스벨트대 대통령은 우생학을 미국 전체로 널리 확산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재학시절부터 인종주의적 편견이 있던 그는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성공은 앵글로색슨족의 우월한 피 때문이다."라는 식의 발언으로 인종주의를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절친한 친구였던 우생학자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 또한 새로운 이민자들과 미국 앵글로색슨족의 혼혈은 생물학적 퇴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인종주의적 이론을 퍼뜨리는 일에 일조하였습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미국인들은 앵글로색슨족이 국제적인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종의 질을 더욱 향상시켜야 하며 자신들의 피에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이는 것은 인종의 퇴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미국에서 인종주의적 우생학을 더욱 강화했으며 마침내 1924년에는 이민 제한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우생학자들은 통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이민자들이 나쁜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빠른 수적 증가가 미국 사회에 위협을 가져온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민 제한법의 통과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이 시기 우생학은 가계도 연구, 우생학적으로 뛰어난 우량가족( (Fitter Families)선발 대회, 지능 검사들을 통해 더욱 활발히 전파되었으며 각종 대규모 재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리처드 덕데일(Richard Dugdale), 헨리 고다드(Henry Herbert Goddard) 등의 우생학자들은 “칼리카크 가족”과 같은 가계도 연구를 통해 범죄, 사기, 매춘, 지적장애 등의 형질이 한 가족 내에서 계속 유전된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연구서들에서는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가족과 우월한 가족의 도덕적, 신체적, 인종적 차이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러한 차이는 여러 주에서 개최된 우생학적으로 뛰어난 가족 선발 대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대중적인 선전과 연구 그리고 대규모 재단의 막강한 금전적인 지원으로 인해 강제적인 불임 수술을 허가한 법은 여러 주에서 쉽게 통과되었습니다. 19세기 미국에는 영국, 프랑스와 같이 정신 이상자, 실업자, 부랑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존재해 왔으나 우생학적으로 열등하다고 지목된 이민자들을 모두 수용하는 데에는 너무나 큰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우생학을 지지하는 몇몇 의사들은 수용소 대신 불임 수술이 더 경제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1907년부터 소수의 수감자를 대상으로 은밀한 불임 수술을 시행해 왔습니다. 이후 1930년대의 대공황기 때 수용소를 운영할 돈이 더욱 부족해지면서 불임 수술을 지지하는 여론이 강해졌고 결국 약 30개 주에서 불임 수술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흑인 지식인들은 유전적 결정론과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본드, 존슨 등과 같은 흑인 지식인들은 당시 흑인이 백인보다 여러 방면에서 열등하다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그것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은 거부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환경의 개선과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 흑인들의 지적, 도덕적, 신체적 형질들은 개선될 것으로 생각하며 라마르크적 우생학을 받아들였습니다.

프랑스의 생물학자 라마르크(Lamarck)는 기린의 목이 길게 진화된 과정을 사례로 ‘용불용설’(用不用說,theory of use and disuse)을 주장했습니다. 용불용설은 사용하는 신체 기관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신체 기관은 퇴화한다는 학설입니다. 라마르크는 하나의 생물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얻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으로 물건을 집거나 글을 쓰기 시작하면 오른손잡이로 살아가는 것이, 생물이 후천적인 행위를 통해서 얻게 된 성질, 즉 ‘획득형질’입니다. 다윈도 라마르크의 학설을 부분 인정했으나 라마르크의 학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가려져서 거의 폐기처분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후 후성유전학이 주목받으면서 잊힌 라마르크의 학설도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후성유전학은 환경이나 행동으로 인해 변화된 유전자 정보가 후손에게 유전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후성유전학은 환경적 요인을 받지 않는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반박하는 이론으로 나름의 기여를 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삶에도 유전자 결정론의 뿌리는 매우 깊고 넓게 뻗어 있습니다. 지금도 학술지나 언론에 ‘비만 유전자’, ‘공부 유전자’ 같은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합니다. 현대 의학의 인간 DNA 판독은 또다시 유전자 결정론에 힘을 실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흑인 지식인들은 유전자 결정론에 반기를 들고 흑인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중시하여 고다드의 지능 검사 결과를 비판하였고 여러 주에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금지되었을 때에도 격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은 백인과 결혼하여 후손들의 유전적 형질이 향상하길 바란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 자체가 흑인의 존엄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점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들의 반 인종주의적 활동이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 골턴의 우생학이 쇠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아 흑인 지식인들의 주장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강제적 불임 수술 폐지에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생학의 결정적 쇠퇴를 불러온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생학의 이론을 이용하여 대량학살을 저지른 독일 나치의 만행이었습니다. 독일의 우생학 운동은 인종위생, 강제불임, 안락사, 집단학살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전개되었습니다. 인종위생 운동은 19세기 말 독일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과정에서 파생된 제반 사회문제와 노동자계층보다 엘리트계층의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에 대한 사회다윈주의적인 관심에 주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초기의 인종위생 운동은 생물학에 엄밀한 지적 기반을 두었고 인종적 정치적 색깔은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3년 나치의 집권 이후 인종위생 운동은 흑인, 유대인, 동부 유럽인들을 인종적으로 구분하고 열등시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급속히 변질하였습니다. 1933년, 선천성 정신질환, 조현병, 간질, 선천성 시각장애인, 알코올 중독, 헌팅턴씨병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도입한 강제불임법을 통과시키며, 이는 1937년 모든 독일 유색 아동을 대상으로 확대해서 나치 말기까지 약 350,000명의 생식능력을 제거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정부가 개인의 죽음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락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던 때였습니다. 1920년 출판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에 대한 살생 허용》이라는 책은 나치 체제하에 우생학 운동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이 책은 불치병 환자뿐만 아니라 정신 질환자, 박약아, 선천성 불구아도 이 개념의 범주에 포함했습니다. 본격적인 안락사 프로그램은 1930년대 말 신체나 정신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동 학살로 시작하였습니다. 초기에는 3살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1941년 17살, 그리고 1943년에는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바람직하지 않은 인종의 건강한 아동까지 포함하였습니다. 자국민 불구아동을 대상으로 시작한 안락사 프로그램은 이렇게 그 대상 나이와 종족을 계속 확대해서 결국 타 종족의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학살 프로그램으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독일이 소련과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 집시, 정신 질환자가 이 프로그램으로 총살당하였고, 결국 강제 수용소에서 노동력이 없거나 병이 들면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이 살인 가스로 대량 학살당하는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참극이 저질러지게 되었습니다.

나치는 우생학 이론을 이용해 열등 인간을 제거하고 우등한 인종을 보호 확산시키려 하였지만, 그들에 의해 열등 인간으로 분류된 유대인, 장애인, 부랑자, 집시 등의 대학살로 인하여 우생학은 오히려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대부분의 나라에서 '우생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치 대학살을 연상하게 하는 나쁜 함의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강제적인 불임 시술과 거세, 학살은 1945년에서 1950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중단되었으며, 각국의 우생학회는 이름을 바꾸고 우생학 학술지도 폐간하거나 유전학 학술지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나치의 만행은 우생학을 추악한 단어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이민 제한법과 강제불임법이 통과되자 우생학에 대한 사회학자, 인류학자, 생물학자들의 비판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이들은 범죄, 매춘 등의 사회문제는 가난, 문맹 등과 같은 불리한 사회여건의 결과이지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며, 인종 간의 차이도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차이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30년 로마 가톨릭교회도 교황의 교서를 통해 우생학을 공식적으로 반대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센 반대의 결과 구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우생학 운동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제한받게 되었습니다.

골턴이 우생학으로 인류를 향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그 두 가지는 긍정적인 우생학(Positive Eugenics)과 부정적인 우생학(Negative Eugenics)입니다. 긍정적인 우생학은 적합한 사람들 사이의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교육, 세금 등의 인센티브 및 출산 장려금을 사용하는 반면, 부정적인 우생학은 결혼 제한, 격리, 성적 거세 그리고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안락사를 통해 출산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우생학은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였고, 미국에서 더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19세기말과 20세기 초까지 단종법의 성립과 이민 제한의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독일 나치가 우생학을 극단적으로 악용하여 인류에게 세기의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그 외의 나라에서 저질러 진 폐해는 가려져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을 청교도의 나라라고만 이해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공부할 때는 공과를 분명하게 해야 그 폐해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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