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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13-인종과 문화적 분리는 장벽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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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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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이른 아침 사람들은 집을 떠나 직장으로 나가 온종일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 가기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에 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누구도 일이 끝난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을 다른 사람의 집보다 선호하는 것이나 자기 가족을 다른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인종차별이라 하거나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며 문제 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사람들이 자기 집과 가족을 다른 사람의 집과 가족보다 더 선호하고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왜 그런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성향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복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성향 안에서 편안함과 행복을 구가하는 것은 가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가정을 우선시하는 것은 모든 가치에 우선합니다. 가정을 희생하면서 공익을 위하는 것이 일면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가정의 가치는 거의 모든 가치에 우선합니다. 가치 질서에서 우선순위를 유지하고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의 창조적 정체성이 잘 유지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동성결혼 합법화로 인하여 가정의 창조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가정의 창조적 정체성이 무너지면 인간에게 가장 편안함과 행복을 보장하는 토대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관계에서와 정치 사회적 갈등이 비롯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간파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가치 질서에서 가정의 지위와 역할이 사회 모든 집단의 토대와 모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지평을 이러한 차원과 맥락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인종과 문화적 분리가 존재합니다. 이 중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많습니다. 마치 집과 가정이 그렇듯이 자연스러운 인종과 문화 분리 현상이 발생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인종분리와 문화적 분리가 발생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인간 삶의 형식입니다. 예를 들면, 흑인들과 백인들은 서로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은 백인 기독교인들이 흑인 기독교인들을 싫어한다거나 혹은 흑인 기독교인들이 백인 기독교인들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인들이 자신의 집단에 대한 우월성을 믿거나 흑인들에 대한 불평 때문만도 아닙니다. 서로에 대해 그와 같은 동기들이 존재하는 때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란 서로를 가장 친밀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영적 교제이기 때문에 인종별 교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유기체인데, 성경은 유기체를 인간의 몸으로 설명합니다. 가족은 유기체의 원 모델이고 교회는 가족과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교회의 핵심 기능과 거의 모든 사역과 역할은 유기적 소통을 지향하는데 그 소통은 민족적 한계 안에서 더 잘 이루어집니다. 흑인들과 백인들은 예배를 드릴 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그 다름은 음악이나 설교 방식에서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그 차이와 다름에서 영적 혹은 도덕적 우열을 가리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거의 모든 흑인과 백인은 자신과 같은 인종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선호합니다. 흑인과 백인이 혼합된 교회 안에서는 인종별 선호도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서로 다른 성향을 폄하하지나 않을까 해서 신경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인종별 선호도의 갈증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인종별 분리 교회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차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미국에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칸디나비아, 한국, 중국, 멕시코, 스페인 등의 혈통 사람들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각각 민족적 교회들은 그 방식이나 강조점에 있어서 구분됩니다. 일반 문화에서는 이민자들의 가족들이 영어를 배워가며 민족적인 차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덜 중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각 민족은 그들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고수합니다. 그 고유한 특성은 많은 이들이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에 형성되고 고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형성하고 고수하는 것은 교회가 지향하는 목적인 유기적 교통에 긍정적으로 부응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각 인종이나 민족의 고유한 특성이 사회적 시각으로 볼 때 분리주의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인종차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복음은 인종적 장벽을 깨뜨리고 극복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해하거나 왜곡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모든 방언과 족속과 나라의 사람들을 불러서 한 위대한 당신의 새 가족으로 만드셨습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관통하여 온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받지 않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 안에서 다양한 민족적 집단을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받을 자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모든 가정 교회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세계로 퍼져나가며 회중들은 언어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기체의 신비는 각각의 지체가 고유한 역할을 하지만 어느 지체도 그 지체 자체를 위해 존재하거나 일하지 않고 다른 지체를 위해 존재하고 일한다는 사실입니다. 유기체인 인간의 몸을 비롯하여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 나아가 세상 모든 집단도 이 유기체의 신비한 역할을 지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유기적 제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기적 역할은 인종과 문화의 분리 때문에 제한을 받거나 불가능해지지 않습니다. 개인과 집단도 각자의 위치와 소속을 유지하면서 "유대의 자유"(freedom of association)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연합과 하나 됨은 반드시 물리적으로 한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등은 각각의 다른 집단들이 유대를 통해 유기적 역할을 할 때 더 원만하고 성숙 된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 집단에서 친구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 교회에서 네덜란드인 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혹은 영국인들이 다수가 된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단서가 붙어야 합니다.

첫째는 교회 성장 이론에는 "동일 집단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자신들과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동일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복음을 문화 집단 안에서 소통하는 것이 집단 간에 소통하기보다 훨씬 더 쉽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을 따라가면 결론은 문화 간 복음 전도는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교회의 노력은 자신들이 더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들에게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는 나름의 매우 강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확실히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이들보다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더 효과적인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스페인어를 배울 능력이 없다면 스페인 사람을 전도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것입니다. 음악, 의상, 음식 등과 같은 다른 문화적 요소들은 그 문화권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복음 사역에는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성령의 초월적 개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 사용이 원활하지 못하고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부족해도 성령께서는 그런 것을 극복하여 회심하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언어의 소통과 문화의 이해를 게을리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들이 민족적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고 모든 배경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배 기독교인들이 문화의 한계에 도전하지 않고 자신들의 공동체의 편안함을 벗어나서 다른 인종과 문화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복음을 다른 문화, 인종, 국가에 전하기 위해서 위협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개별 기독교인이 문화를 넘어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체적인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기 때문에 문화 간 그리고 인종 간의 유대의 자유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둘째, 교회들은 자신들의 주위에 특정한 비율의 모든 민족과 국가집단을 두려고 노력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인종과 문화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환영해야 합니다. 한 교회 안의 소수 인종은 지도자의 자리를 탐내거나, 교회 안에서도 소수자 우대 정책 같은 것을 요구하거나, 특수한 정치적 태도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교회 안의 소수 인종은 주류 인종들과 같은 수준의 환영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백인이 주류인 교회의 흑인 기독교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흑인 가족이 새로 이사를 하여 백인이 주류인 교회에 처음 출석하였는데, 그 주간에 목사가 심방을 하여 멀지 않은 곳에 흑인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보다 그 교회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흑인 가족은 진정한 환영을 받지 못한 것에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백인 교회 목사는 인종차별적인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목사는 최선의 의도로 진심 어린 충고를 했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같은 인종과 부류의 사람들과 예배드리기를 선호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백인 목사는 그러한 사실을 일반화시켜 그 흑인 가족이 흑인교회에서 예배드리기를 선호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 지역의 흑인교회에 관한 정보를 줌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와주려고 한 그 백인 목사의 시도는 그 흑인 가족을 인종차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혹자는 흑인 기독교인이 이 목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악한 의도를 뒤집어씌웠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인종의 문제에 관해서 백인 기독교인들은 흑인들에게 특별히 더 주의를 기울일 의무가 있고, 많이 가진 자와 많이 배운 자는 그러지 못한 이들에 대해 더 배려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원리로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백인 교회는 모든 이들을 환영하는 것의 중요성을 어느 다른 교회보다 더 강조하고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모든 교회는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 대한 주된 반응이 강한 긍정과 진정한 환영이 되어야 합니다. 흑인은 흑인교회를 찾고, 히스패닉은 히스패닉 교회를 찾고, 중국인은 중국 교회를 찾고, 한국인은 한국교회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다른 인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 안에 머물 수 있음을 그들이 믿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회중에게 다문화주의나 다민족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다민족이 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 될 것이며 이는 교회가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더 잘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은사를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0-2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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