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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9-편견과 차별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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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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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사람들은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편견을 신념처럼 소중히 여기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다른 사람이 편견이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더 소중히 여긴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편견을 지적받을수록 자신의 편견에 대한 확신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의미하며, 상대에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편견의 사촌이라고 할 만한 고정관념은 잘 변하지 않는, 주로 행동을 결정하는 확고한 의식이나 관념이나 어떤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하고 지나치게 일반화된 생각들을 의미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는 용어로 비판을 하려면 '잘못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하는 것이 어법상 맞습니다. 왜냐하면,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는 용어는 중립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심장을 갖고 있다.'라는 사실은 우리가 직접 확인하거나 관찰하지 않아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이며, 이 상식적 고정관념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쪽으로 사용하거나 이해하는 경향이 많으므로 그 용어의 중립성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본 글에서는 편견과 차별대우에 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편견(Prejudice)은 어떤 집단이나 그 집단 구성원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차별대우(discrimination)는 다른 집단이나 그 구성원을 적대하여 취해진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견은 가지고 있지만 차별대우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차별은 하지만 편견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존 도비디오(J. Dovidio)는 편견을 어떤 사회 집단 또는 그 집단 구성원에 대한 부당하고, 이성이나 의지보다 감성을 중히 여기는 주정적(主情的 )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정의는 편견이 긍정적일 수 있다는 이유로 한계를 지닌 정의라고 비판받기도 합니다. 편견과는 달리 차별대우는 일반적으로 어떤 집단과 해당 구성원을 향한 부정적인 행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적대 집단에 대한 차별대우는 다양한 형태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든 올포트(G. Allport)는 차별대우에 5가지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나치 독일과 같이 특별한 경우에 이 단계가 급속히 증가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단계는 반항적 말투로 적대 집단을 향한 언어적 공격이고, 둘째 단계는 회피로 적대 집단을 체계적으로 회피하는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어떤 경우에는 마치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을 가슴에 달도록 한 것처럼 그 집단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단계가 포함되기도 합니다. 셋째 단계는 차별대우의 단계로서, 적대 집단은 다른 집단과 비교하여 시민권, 직업 등에서 의도적인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넷째 단계는 신체적 공격을 가하는 단계로써 적대 집단 구성원들은 공격을 당하고 그들의 소유물이 파괴되기도 합니다. 다섯째는 몰살의 단계인데, 적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몰살하려는 의도적 시도가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폴 포트의 킬링 필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보스니아 내전, 르완다의 인종 말살,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학살 등이 모두 차별대우의 다섯째 단계에 속합니다. 그 외에도 공산국가나 제삼 세계 독재자들에 의한 인종 말살의 경우도 적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 안에서도 첫째 단계에서 넷째 단계에 해당하는 차별대우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편견이 있지만 드러나게 차별하지는 않고 익명으로 차별하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1935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공무원인 라피어(LaPiere)는 미국으로 여행을 온 중국인 부부를 위해 안내와 통역을 하며 250개의 호텔과 레스토랑을 방문하였는데, 이 부부가 서비스를 거부당한 것은 단 한 번 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중국인에 대한 미국인의 차별이 거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라피어는 그들이 방문한 호텔과 레스토랑 주인들에게 중국인 손님을 받을 것인지를 편지로 물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실제로 방문했을 때와는 아주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한 곳이 50%였고, 그중 90%가 중국인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편견이 드러나게 될 때 사회적 압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내면에는 편견이 있지만 없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익명이 보장되면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자신이 편견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으며, 실제보다 더 관대한 이미지로 자기 자신이 드러나고 평가되기를 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편견은 알 수가 없고, 비난하거나 탓할 수도 없습니다.

편견을 다시 또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공연한 편견입니다. 이는 대외적으로 특정 집단이나 대상에 대해 공공연하게 편견의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인종 분리주의를 주장하거나 다른 인종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공연한 편견은 아주 뻔뻔스럽고 나쁜 것이지만 대응하기는 오히려 쉽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 암묵적 편견입니다. 겉으로는 편견을 거부하는 것처럼 처신하지만, 위장이 가능하여 익명이 보장되면 주저 없이 편견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은 공공연한 편견보다 대응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하면서 흑인 이름이 적힌 투고 글에 대해서 집요하게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는 자동적인 편견입니다. 이것은 두뇌와 지각(perception)의 차원에서 편견이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차를 운전하여 흑인 밀집 지역에 들어가면 거의 자동으로 차 문을 잠그는 이들이 많습니다. 흑인의 무표정한 얼굴을 화난 얼굴로 오해하거나 흑인이 무엇을 들고 있으면 총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견은 그것이 공공연한 편견이나 암묵적 편견이나 자동적인 편견 모두가 반사회적인 태도입니다. 편견이 많은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친 사회적이지 못한 편견을 개혁하려면 편견을 지적하여 드러내고 편견에 대해 사회적 제재를 가해야 하는데 암묵적 편견이나 자동적 편견 같은 것은 지적하여 드러내기가 어렵고 사회적 제재를 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편견이 소위 보수 우익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심리학자들은 일반화된 편견(generalized prejudice) 또는 심리적 불관용(psychological intolerance) 같은 용어를 보수 우익들에게 적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백인이나 기득권자들에 의한 차별, 타자화, 근본주의, 공격성, 획일화, 다양성의 거부, 자기중심성, 우월주의, 선민사상 같은 것들을 모두 보수주의자들(conservatives)의 특징적 편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편견이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나타나다가 급기야는 편견이 좌파의 전유물처럼 되는 듯한 경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주의자들의 편견에 의해서 대통령이 탄핵 되었고 미국에서도 진보주의자들의 편견에 의해 대통령이 여러 번 탄핵위기에 몰리기까지 하였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금까지도 집요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편견이 거의 백인이나 기득권자들에 의한 유색인종이나 소수 집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종교인이나 학자들을 비롯하여 사회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의 노력으로 유색인종이나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유색인종과 소수자에 대한 법적 장애나 사회적 장벽도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유색인종이나 소수자들은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폄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종들 간의 편견, 종교 간의 편견, 다른 성에 대한 편견, 다른 사상과 이념에 대한 편견 또한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편견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황은 인간 역사에서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편견을 줄여가야 합니다. 편견과 폄하가 때로는 실제적이며 때로는 상상에 그치기도 하지만 실제 적이든지 상상에 머물든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고 인간사회에도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기에 개혁되어야 할 대상들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유쾌하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인종적인 유머가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상처를 줄 가능성이 큰 경우라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종적 유머가 그 이면에 있는 진짜 적대감을 숨기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은 그 사람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있기 전에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르고 독특하지만, 또한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간에는 영적 도덕적 차이, 다른 은사(자연적 영적), 다른 종류의 훈련과 성취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도덕적,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다른 이들을 평가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특정한 일을 함에 있어서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증거에 근거하고 사려 깊은 사고에 근거해서 공평하게 내려져야 합니다. 편견에 사로잡힌 생각은 여러 증거를 공평히 검증하기도 전에 어떤 전제들 때문에 충분한 증거나 사고도 없는 채로 너무 성급하게 평가를 합니다. 개인에 대한 편견은, 때로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 대한 평가에 근거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이것이 인종에 관한 판단이라면 우리는 이를 인종적 편견이나 인종차별이라 부릅니다. 만약에 이것이 성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은 성차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이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판단에는 윤리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최선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구약 시대에 범죄를 판단할 때에는 두세 증언이 있어야 했습니다(신 17 : 6; 19:15;히 10:28), 그리고 이 원칙은 신약 교회의 제자들에게도 계속되었습니다(마 18:16; 고후 13:; 딤전 5:19).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딤전 5:21)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도 편견에 대해서 반대하였습니다(약 2 : 4 : 3:17). 편견은 선입견을 나타내는 성경적 용어인데, 이는 어떤 사람이 그럴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비이성적 선호 때문에 그를 나쁘게 대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사랑을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는다"(고전 13 : 7)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강력한 반대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호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해야 합니다. 법적인 관계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입증의 책임은 언제나 기소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가 증명되기 전까지는 무죄합니다. 이것이 도덕적 영적 판단의 규범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은사와 능력에 관한 판단은 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테니스 선수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가 훌륭한 테니스 선수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판단하기 전에 약간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집사들의 자격 요건을 나열할 때 그는 그들을“먼저 시험하여 보라”(딤전 3:10)고 하였습니다. 장로들도 그 직분에 오르기 전에 도덕적, 영적 성숙함을 먼저 증명해야 했습니다(딤전 1 : 7). 하지만 이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의 편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성취한 것을 근거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 근거해서 그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어느 집단에 속했다는 것 자체가 실격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무슬림이라면 그 사실 자체로 그는 장로교회의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범죄나 폭력적인 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관에 가입하는 것은 범죄를 돕는 것이며 정부는 이를 적법하게 처벌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 모임에 속했다는 사실과 그 개인 간의 관계는 그다지 선명하지 않습니다. 쿠란은 때로는 이슬람의 적들에 맞서는 폭력을 옹호하며 때로는 평화로운 공존을 격려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무슬림을 서양 백인들의 편견의 희생자들이라고 생각하며 옹호합니다. 하지만 무슬림은 많은 부분애서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무슬림들의 편견은 종교적 확신과 같아서 초기에는 전략적으로 입을 다물지만 결국은 이슬람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제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진보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판단에의 해서 무슬림이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무슬림에 대해 너그러운 그들조차도 생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무슬림은 이슬람 이외에 사람이나 종교나 정치나 문화에 대해 노골적이고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슬림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실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 극단적 편견을 신념과 신앙으로 내세우며 그것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테러와 폭력까지 서슴지 않지만, 이슬람은 그와 같은 극단적 무슬림은 12억 무슬림 가운데 1%도 안 된다는 사실만 강조하고 실제로 테러와 폭력을 예방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오직 한 가지 편견만이 정당화되고 모든 다른 것은 거부됩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가 무슬림과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극단적인 무슬림의 위험이나 공산주의의 위험이나 진보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편견을 간파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그들에게까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을 때, 바울은 이를테면 무슬림이나 공산주의나 진보주의 같은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3-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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