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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끝에 악수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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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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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나폴레옹이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알프스 원정에서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는 “이 산이 아닌가벼”라고 했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던 그였기에 지친 대군을 다그쳐 죽을힘을 다해 또 다른 산의 정상에 올라 자세히 확인하고는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벼”라고 하자 지칠대로 지친 병사 한 사람이 “저 사람 나폴레옹이 아닌가벼”라고 했다 합니다. 나풀레옹이나 병사가 충청도 사람도 아닌데..., 인간사나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 집단이나 개인이 외길을 고집하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를 풍자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입니다.

정치인이나 정치 세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정치인은 표면적으로는 명분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능성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 가능성이란 권력으로 구체화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가능성을 따라 진퇴를 결정하여 국민을 실망하게 하는 것이 국민에게 약간은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겠지만 가능성만 확인되면 국민의 기대나 정의와 법을 무시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이 소위 능력 있는 정치인의 행태입니다. 이곳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현실 정치와 주류 언론은 국민의 정서와 정신과 사상과 가치관에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도 더 치명적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언론들의 온갖 거짓말과 유치한 행태를 지켜보면서 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알지 못했던 정치인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나 자신이 얼마나 정치를 외면해왔던가를 반성하게 합니다.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은 정치적 엘리트가 다스리는 그의 이상 국가 아래서 소수의 엘리트가 돈과 명예를 탐한다는 오명을 쓰게 될까 두려워서 정치를 꺼리는 것을 지적한 말이라서 반민주적 의미를 내포한 금언이라고 하지만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모든 국민이 귀담아들어서 응용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보수주의자 조제프 드 메스트러가 1811년 러시아 헌법 제정에 관한 토론에서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라고 하였습니다. 1859년 새무엘 스마일스(Samuel Smiles)는 자기개발서 “자조론”(Self-help)에서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 국민보다 수준이 높은 정부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국민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지게 마련이다. 국민보다 수준이 낮은 정부가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지듯이 말이다. 한 나라의 품격은 마치 물의 높낮이가 결정되듯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법체계와 정부 안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다스려질 것이고, 무지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치가 성숙하려면 그 나라 국민이 성숙해야 합니다. 국민의 수준이 낮으면 정치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 자신이 투표한 상.하원의 이름도 잘 모르고 투표하였습니다. 기독교계는 목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마치 외도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여서 나 자신이 이러한 분위기를 방패와 핑계 삼아 직무유기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1892년 독일에서 태어난 루터교회 목사인 마르틴 니묄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로 시작하는 시가 있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에게 들이닥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이 시 마지막 행의 상황이 닥쳐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몇몇 나라에 들이닥친 그 상황이 이 나라에도 도래하게 될까를 사뭇 심각하게 걱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유럽에서, 아시아에서, 남미에서 조국을

탈출하는 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감옥을 탈출하거나 포로로 잡혀간 나라를 탈출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조국을 탈출하는 것은 정치적 망명 말고 다른 경우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국을 탈출하는 이들이 수백, 수천 명에 이르고 있는 상황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바둑 격언에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프로 바둑기사는 몇십 수를 내다보며 바둑을 두고 아마추어는 불과 몇 수를 내다보지 못하여 악수를 둡니다. 하지만 프로들도 좋은 수를 찾으려고 너무 생각을 많이 하다가 악수를 둘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몇십 수를 내다 보는 프로라고 하여도 지나치게 장고하다가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몸이 지쳐서 악수를 두게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국을 앞둔 프로 선수들이 그날의 몸 상태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을 보아 그러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둑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인생을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어서 장고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장고 끝에 시작한 일보다 막 저지르듯 시작한 일이 예상외의 좋은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벌과 똥파리를 각각 병에 넣고 마게를 닫지 않은 채 입구를 어두운 곳을 향하게 하고 막힌 쪽을 밝은 쪽으로 향하게 두었습니다. 그러자 벌은 밝은 쪽 끝 막힌 곳에서 장고(?)를 하다가 죽었고, 똥파리는 미친 듯이 좌충우돌 날뛰다가 어두운 쪽 입구를 발견하고 빠져나가 살았다고 합니다. 영리한 벌은 밝은 쪽으로만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었고, 무식한 똥파리는 무식하게 저돌적으로 좌충우돌하다가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떤 때는 단순한 것이 장고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생은 장고하면서 살아야 하고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생각이 깊지 못하거나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실패할 확률은 더 높아집니다. 그렇다고 장고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공보다 정직과 성실이 더 고급 가치이기 때문에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해도 정직과 성실로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정직과 성실로 최선을 다했다면 자신이 기대하는 결과에 이르지 못해도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순종과 경건을 요구하십니다. 전도서 기자는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고 성공은 자신의 만족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것을 인정하여 사는 것이 정직한 것이고 자신의 성공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한데 묶어서 성취하려는 것은 꾀를 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은 꾀를 내어 하나님의 영광에 편승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깊이 생각하다가 처남 좋고 매부 좋은 꾀를 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고 나도 복 받아 만사형통하는, 외람되게도 하나님과 상생하려는 꾀를 내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우상에게나 어떤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경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을 깊이 해야 하지만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님을 처치하는 일에 장고를 거듭했지만 묘수를 찾을 수 없을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공의회의 어른 답게 기가 막힌 신의 한 수를 제시하였습니다. 그 신의 한 수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야바는 그 기막힌 신의 한 수를 제시하면서 사뭇 우쭐대며 공회원들의 생각이 짧음을 나무랐습니다. 공회원들의 장고도 가야바의 신의 한 수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결정과 행한 모든 일은 우리가 믿고 기댈 만큼 견고하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견고한 토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시편 90편의 기자는 인간의 손으로 한 모든 일이 견고하게 되도록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한 사회와 국가와 인류의 토대도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티끌로 돌아가고, 사람에게 유구한 천년의 세월이 하나님께는 한순간과 같으며, 인간의 삶은 아침에 돋아나서 저녁에 시드는 풀과 같이 덧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덧없는 인간 실존에서 탈출해보려고 일상에 천착하기도 합니다. 자기실현을 위한 질주와 타인과의 경쟁을 하는 것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잊어보려고도 합니다. 인생과 자연은 아무리 심오하고 신비하고 아름답고 황홀해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인간의 깊은 생각과 성실과 업적은 삶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토대로 삼는 사람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두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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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셨지만 정치가 주제는 아닌 것 같고 하여튼 균형감 있는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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