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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양식의 절대 결핍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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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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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마술로 생업을 삼던 이들은 자기들의 책을 불사르고, 우상의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업으로 삼던 이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우상을 섬기지 않게 되자 생업에 큰 타격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이 일에 앙심을 품은 데메드리오가 동업자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제거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다행히 서기장이 폭동을 진정시켜 바울은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바울의 에베소에서 복음 전파는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에베소 교회에는 여전히 이단에 대한 위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거처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심하고 에베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소아시아 교회들 안에 이단의 활동이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새로 믿게 된 이들이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우므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어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3-4). 여기 언급된 다른 교훈이란,바른 복음에다 이런저런 것들을 섞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신화는 그리스철학을 지칭하는 것이고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유대의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가르침이 기독교 복음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다가 자기들의 주장을 첨가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던 것입니다. 혼합주의는 현대 기독교 안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그 폐해는 심각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위경이라는 가짜 성경이 돌아다녔는데, 위경은 천사도 할례를 받는다고 하고, 아담도 양성(兩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또 아담과 하와가 결혼한 것 자체를 원죄라고 주장하고, 자기들은 고상한 왕족의 혈통을 타고났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짜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가짜 계시록도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성경과 전통을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거짓 가르침을 쉽게 거부하거나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 해석도 가기들의 주장에 맞게 고쳤습니다. 허탄한 말과 신화 그리고 소위 신비한 지식을 지닌 거짓 교사들은 에베소교회에 치명적 해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요한도 지적하였지만 참된 복음은 사랑 안에서 교회를 세우지만 거짓 지식은 믿음과 행동 사이에 통일성이 없습니다. 복음의 참지식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왜곡된 복음과 거짓 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파괴합니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거짓 가르침의 잘못 중 중대한 오류는 ‘자연’과 ‘은혜’ 사이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창조물 자체가 악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 후에도 창조물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물들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영혼은 고귀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연 질서까지도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결혼을 폄하하였습니다. 그들 중 가르치는 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가톨릭에서 사제가 결혼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해에서 기인한 제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엡 4: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기독교 안에 아직도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많고, 결혼하면 안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무턱대고 고상하고 경건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과 교회의 역사가 2천 년이 넘었는데도 지금도 그러한 교훈을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단이나 거짓 교사의 정체가 눈에 확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단성과 거짓이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순수하고 고상하고 멋있게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는 사람을 그런 것 하는 사람보다 더 경건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의와 질서와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보다 신령한 은사와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이 더 경건하고 신령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령한 것과 모든 보편 가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 질서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 질서 중에 자연 질서와 사회 질서가 있습니다. 이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 수단입니다. 정치, 경제, 학문, 예술, 과학, 문화, 제도 등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귀한 선물입니다. 정의와 질서와 윤리 같은 것은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특별 은혜인 구원과 일반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단과 거짓 가르침 때문입니다. 수많은 일반 은혜를 무시하는 데도 너무도 신령하게 보이고 경건하게 보이고 능력 있게 보입니다. 목회자가 배임과 탈세로 유죄 선고를 받거나 7계명을 범해도 여전히 그를 신령하고 능력 있는 목회자로 따르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나 경건이 일반 은혜와 조화되느냐를 간파해야 합니다. 어떤 지도자가 성경을 잘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신령한 은사를 나타내어도 그것이 바른 것인지 가짜인지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한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깊고 신비로운 지식과 신령한 은사가 있어도 정의와 윤리와 사회 질서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가짜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단을 보면 이런 것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신앙을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신비로운 내적 체험으로 깨달아지고 전수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설교자 중에는 은혜의 복음과 성경 계시의 권위보다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인들도 설교자의 체험이나 신비로운 설명을 성경보다 선호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 신학 무용론이 많은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무시하는 이들이 거의 이원론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원론은 참복음을 심각하게 왜곡시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철학의 신화와 유대교의 족보에 몰두하는 신앙생활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은 말싸움을 일으킬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과 교회에 대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였다가 어떻게 복음 사역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한 뒤에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해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간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찬양처럼 선포하고 난 다음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놀라운 구원을 선포하면서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고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법과 정의와 윤리와 질서를 파괴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런 질서도 하나님께서 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것도 죄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런 것들은 죄의 결과이지 죄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 폭행, 간음, 도둑질, 속임수, 불효 등도 죄이고 또 세상의 법을 위반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더욱더 포괄적이고 심층적입니다. 어떤 영화에서 핵전쟁과 대자연 재해로 지구가 처참한 지경에 처하였습니다.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먹을 양식이 없게 되자 처음에는 부상당한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하여 그다음에는 약한 사람을 차례로 잡아먹게 되는 극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갈등의 이유는 누가 더 정당하고 옳으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떤 것을 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잡아먹는 순서를 어기는 것을 죄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힘 있는 자가 고기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을 죄라고 해야 할까요? 그 상황에서는 그런 것도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떼강도가 은행을 털어 돈을 나눌 때 한 놈이 다른 동료들 몰래 먼저 돈을 좀 챙겼다면 그 사람을 양심 없는 놈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죄라고 말하는 것들은 그런 수준의 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죄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서로 싸우고 속이고 죽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양식과 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죄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김군은 몸무게가 200파운드가 넘기 때문에 나쁜 놈이다는 것이 존재론적인 설명입니다. 성경은 물론 죄를 의지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인간을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책임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것까지를 포함해서 죄는 존재론적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고백은 영적 양식의 절대적 결핍 상태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서로를 잡아먹어야 생존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물과 양식의 절대 결핍 상태가 죄의 세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맥락을 상정하시고 내가 생명의 양식이고 영생의 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물과 양식의 결핍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없는 자에게는 물과 양식이 없기 때문에 온갖 괴악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죄는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즉 생명의 물과 영생하는 양식이 없기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문제의 해결책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권이든 정의이든 복지제도이든 친환경 정책이든 소수자 인권 보호이든 노동환경 개선이든 그 어떤 고상한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상적인 정책이라도 다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들의 모든 생각은 영적 양식의 절대 결핍으로 인하여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대로 나아가고,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적 양식이 풍족하여 서로 잡아먹는 악을 저지르지 않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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